역사/한국사 (118) 썸네일형 리스트형 [한국사] 일본의 침략과 국권 피탈 일본의 한국 강제 병합 러일 전쟁의 발발 청・일 전쟁 이후 러시아와 일본은 대한 제국을 두고 대립하였다. 일본은 군사력을 키워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으로 조선에서 세력이 약해졌고, 세력 만회를 위해 을미사변을 일으켰으나 아관 파천으로 러시아의 대한 제국에 정치적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그러던 중 중국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났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일본을 비롯한 열강은 연합군을 구성하였다. 러시아가 의화단을 진압한 이후에도 만주에 주둔시킨 군대를 철수하지 않자, 영국과 일본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가 제1차 영・일 동맹을 맺었고(1902), 미국의 지지도 얻었다. 이 무렵 러시아는 압록강 일대의 삼림 채벌권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압록강 하류 용암포에 .. [한국사] 대한 제국과 광무개혁 대한 제국 정부의 개혁 추진 대한 제국은 1900년 4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만국 박람회에 참여하여 한국관을 세웠다. 한국관의 주전시관은 경복궁의 근정전을 재현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전시관 내부에는 신발, 모자, 비단 제품, 악기 등 다양한 공예품이 전시되어 세계인의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전시된 물품은 막대한 수송비 부담으로 인해 대한 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대한국 국제 반포 독립 협회 해산 이후 대한 제국은 황실 중심의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1899년 8월에는 대한국 국제를 반포하였다. 대한국 국제에는 '대한국은 세계 만국에 공인된 자주독립국이며, 만세토록 불변할 전제 정치'라고 하는 규정을 명문화하였다. 또한, 황제가 육해군 통솔권,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 등 모든 권한을 가진다.. [한국사 인물] 고려 명장 양규 | 3만명을 구출하고 장렬히 전사한 영웅 양규(楊規) 미상 ~ 1011년 3월 5일(음력 1월 28일) 양규(楊規)는 고려의 무장으로 제2차 고려 거란 전쟁 때 도순검사(都巡檢使)로서 활약하였고, 1024년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으로 추봉 되었다. 양규의 대활약 강조의 정변(1009년)으로 목종이 폐위당하고, 현종이 옹립되자 그것을 명분으로 삼아 거란 황제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쳐들어왔다(제2차 고려 거란 전쟁, 1010년 11월). 현종 원년 제2차 고려 거란 전쟁 당시 양규는 도순검사(都巡檢使)로 흥화진에 부임해 있었고, 흥화진사 정성(鄭成), 흥화진부사 이수화(李守和), 판관 장호(張顥) 등과 함께 3천 명의 병력으로 성을 지키고 있었다. 첫 번째 전투는 흥화진(興化鎭)에서 벌어졌다. 11월 17일부터 일주일간 .. [한국사] 독립 협회 독립협회 고종은 대한 제국을 선포하면서 청의 예속국으로서의 '조선 국왕'이 아닌 '황제'를 나타내는 국새 10과를 새로 만들었다. 그중 하나인 황제지보는 손잡이의 형태를 이전의 거북이 모양에서 황제를 상징하는 용 모양으로 바꾸어 만들었다. 대한 제국의 국새는 6・25 전쟁 때 일부가 국외에 불법 반출되었다가 2014년에 환수되었다. 독립 협회의 설립 아관 파천 이후 러시아는 조선에 영향력을 강화하면서 각종 이권을 침탈하였다. 다른 열강도 기회균등을 요구하며 조선의 이권을 침탈하였다. 갑신정변 이후 망명 중이던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이 민중 계몽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정부의 지원을 받아 1896년 한글판과 영문판으로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개화 관료, 지식인과 함께 독립 협회를 창립하였다. 독립 협회는 조선.. [한국사] 갑오개혁 갑오개혁 군국기무처 설치와 제1차 갑오개혁 조선 정부는 농민군과 전주 화약을 체결한 이후 교정청을 설치하여 독자적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한 뒤 흥선 대원군을 섭정으로 하는 김홍집 내각을 세웠다. 김홍집 내각은 교정청을 폐지하고, 개혁 추진 기구로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였다. 군국기무처는 일본이 청・일전쟁으로 조선에 개입하기 어려운 틈을 타 갑신정변의 개혁안과 동학 농민 운동의 요구를 반영하여 개혁 법안을 제정・공포하였다(제1차 갑오개혁, 1894). 정치 분야에서는 중국의 연호 대신 개국 기년을 사용하였다. 궁내부를 설치하여 왕실과 정부 사무를 분리하고 국왕의 권한을 제한하였다. 기존의 6조를 8아문으로 개편하였고, 경무청을 중심으로 하는 경찰 제도를 도입하였다. 또한 사간원을.. [한국사] 동학 농민 운동 동학 농민 운동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농민군의 무기는 죽창이나 농기구가 대부분이었고, 기껏해야 화승총 정도가 있었다. 농민군은 대나무를 쪼개 장태를 만들고 그 안을 볏짚이나 솜으로 채워 총알을 막는 데 활용하였다. 이에 반해 관군과 일본군은 소총과 기관총 등 근대식 무기로 무장하였다. 이러하듯 무기에서 큰 차이가 났으나 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농민들 고통의 심화 갑신정변 이후 개화 비용 마련, 외국에 대한 배상금 지급 등으로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면서 농민의 조세 부담이 늘어났다. 이런 가운데 집권층의 부정부패로 정치 기강이 해이해지고 매관매직이 성행하면서 지방관의 수탈은 더욱 심해졌다. 지주들은 일본으로 쌀을 유출하는 과정에서 소작농을 수탈하였으며, 일본 상인이 들여온 영국산 면제품이 .. [한국사] 갑신정변 갑신정변 답례 사절단으로 미국에 갔다 돌아온 홍영식은 고종에게 근대적인 우편 제도를 실시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정부는 우편 업무를 관장하기 위해 우정총국을 설립하였다. 우정총국의 개국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리던 날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개화파 관리들은 정변을 일으켰다. 개화파의 분열 개화파 내에서는 개화의 개념과 방향을 두고 입장 차이가 있었다. 이는 임오군란 이후 더욱 확대되어 청과의 관계 설정, 개화의 속도와 방법에 대한 입장 차이로 개화파는 급진 개화파와 온건 개화파로 나뉘었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을 중심으로 한 급진 개화파는 청의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 문명개화론을 내세운 일본의 메이지 유신처럼 서양의 과학 기술뿐만 아니라 사상과 제도까지도 수용하여야 조선이 근대 국가로 발전.. [한국사] 개화 정책의 추진 및 반발 개화 정책의 추진 및 갈등 고종은 수신사 파견 전에 김기수를 만나 '들을 만한 모든 일은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반드시 기록해 오라.'라고 거듭 당부하였다고 한다. 일본에 도착한 수신사 일행은 일본의 주요 인사를 만나고 근대 시설을 살펴본 후 돌아왔다. 개화 정책의 추진 조선은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일본에 수신사를 파견하여 일본과 세계의 정세를 파악하려 하였다. 근대화에 필요한 기술과 정보를 조사하기 위한 제1차 수신사 김기수 일행은 일본의 근대시설을 시찰하였다(1876). 하지만 개항에 대한 반대 여론으로 제1차 수신사를 파견한 이후 4년 만에야 김홍집을 대표로 하는 제2차 수신사를 파견하였다. 일본과의 조약 개정을 위해 파견된 제2차 수신사 김홍집 일행은 목적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일본의 발전상을 살.. 이전 1 ··· 8 9 10 11 12 13 14 1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