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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동학 농민 운동

동학 농민 운동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농민군의 무기는 죽창이나 농기구가 대부분이었고, 기껏해야 화승총 정도가 있었다. 농민군은 대나무를 쪼개 장태를 만들고 그 안을 볏짚이나 솜으로 채워 총알을 막는 데 활용하였다. 이에 반해 관군과 일본군은 소총과 기관총 등 근대식 무기로 무장하였다. 이러하듯 무기에서 큰 차이가 났으나 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썸네일 동학 농민 운동
동학 농민 운동

 

농민들 고통의 심화

     갑신정변 이후 개화 비용 마련, 외국에 대한 배상금 지급 등으로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면서 농민의 조세 부담이 늘어났다. 이런 가운데 집권층의 부정부패로 정치 기강이 해이해지고 매관매직이 성행하면서 지방관의 수탈은 더욱 심해졌다. 지주들은 일본으로 쌀을 유출하는 과정에서 소작농을 수탈하였으며, 일본 상인이 들여온 영국산 면제품이 유통되면서 농촌 가내 수공업도 큰 타격을 입었다. 농민 사이에서는 집권층을 향한 불만과 일본에 대한 반감이 커져 갔다. 

 

 

 

 

동학의 확산과 교조 신원 운동

     동학은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던 농민들을 중심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정부의 탄압으로 위축되었던 동학은 2대 교주 최시형이 교리와 교단 조직을 정비하면서 교세가 커져, 경상도를 벗어나 전라도와 충청도로 확산되었다. 동학의 교세가 빠르게 확산되자 정부는 동학을 사교로 규정하여 탄압하였으며, 지방관들은 동학을 금한다는 명분으로 동학교도의 재산을 수탈하거나 잡아 가두기도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동학 교도들은 교조 신원 운동을 펼쳤다. 1892년에는 충청도 공주와 전라도 삼례 등에서 집회를 열고 포교의 자유와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어 광화문에서 복합 상소로 교조의 억울함을 벗겨 줄 것과 포교의 자유를 요구하였다.

     동학교도들은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1893년에 보은금구에서 대규모 집회를 개최하였다. 이 집회에서는 탐관오리의 처벌과 일본과 서양 세력을 축출 등을 내세워 농민을 대변하는 정치 운동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였다. 

 

 

 

 

고부 농민 봉기

     대표적인 곡창 지대인 고부는 여러 물산이 모이는 곳으로, 전라도에서 번성하던 지역 중 하나였다.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각종 명목으로 농민들을 수탈하였다. 특히 기존에 있던 보 아래에 농민들을 동원하여 만석보를 만들고 세금을 거두었다. 이에 분노한 농민들은 전봉준의 주도로 봉기를 일으켜 고부 관아를 점령하였다. 조병갑은 이미 도주하였지만 농민들은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억울하게 옥살이하던 사람들을 풀어주고, 창고의 곡식을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또한 수탈의 상징인 만석보를 허물었으며, 부패한 향리들을 붙잡아 다스렸다.

     정부는 고부 봉기 소식을 접하자 조병갑을 파면하고 군수를 새로 파견하였다. 새 군수는 그동안의 잘못을 고칠 것을 약속하였고, 이에 농민들은 일단 해산하였다. 그러나 안핵사로 파견된 이용태가 농민들을 동학교도로 몰아 가혹하게 탄압하면서 농민들의 불만은 점차 높아져갔다.

 

 

 

 

동학 농민군 봉기(제1차 봉기)

     고부 농민 봉기에 가담한 농민들에 대한 처벌이 이어지자 무장으로 피신하였던 전봉준은 동학의 접주인 송화중, 김개남 등과 전라도 일대에서 군사를 모아, 폭정을 없애고 백성을 구한다는 뜻의 '제폭구민',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히 한다는 뜻의 '보국안민'을 내세우며 봉기하였다(1894). 동학 농민군은 고부를 다시 점령하고 백산에 집결하여 봉기의 취지를 알리는 격문과 농민군 4대 강령을 발표하였다.

     농민군은 태인을 점령하고, 황토현에서 보부상이 포함된 전주 감영군을 격파하였다. 황토현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많은 농민이 봉기에 참여하였다. 농민군은 곧장 전주성으로 가지 않고 방향을 돌려 전라도 서남부 지역의 정읍, 고창, 무장, 함평 등을 점령하였다. 

     정부가 한성의 경군을 파견해 농민군을 공격하자, 농민군은 장성 황룡촌에서 이를 격파하였다. 이후 승세를 굳힌 농민군은 전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조선 정부는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청에 파병을 요청하였다. 청은 톈진조약에 따라 일본에 파병 사실을 알리고 군대를 아산만에 상륙시켰다. 일본도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인천에 대규모 군대를 상륙시켰다. 청에 이어 일본까지 군대를 파견하자 정부는 사태를 빨리 마무리 짓고자 하였다. 농민군도 청・일의 개입으로 나타날 혼란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정부와 교섭에 나서 폐정 개혁과 농민군 해산에 합의하여(전주 화약) 전주성에서 물러났다.

     전주 확약 이후 정부는 교정청을 설치하여 개혁에 나섰다. 해산한 농민군도 전라도 일대에 자치 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여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고, 직접 폐정을 개혁하였다. 노비 문서를 불태워 천대받던 노비를 해방하였으며, 탐관오리와 부패한 양반을 징벌하였다. 또한 각종 잡세를 폐지하고 농가 부채를 탕감하기도 하였다.

 

동학 농민군 제1차 봉기 지도
출처: 동아출판 고등학교 한국사

 

 

 

 

청일 전쟁

     전주 화약으로 청・일 양군은 더 이상 조선에 주둔할 명분이 없어졌다. 일본은 조선의 내정 개혁이 이루어지면 철수하겠다고 하였으나, 정부는 이를 거절하고 청・일 군대의 철수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청에게 공동으로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자고 제의하였다.

     청과의 교섭에 실패하자 일본은 1894년 6월에 군대를 동원하여 경복궁을 점령하고 흥선 대원군을 섭정으로 하는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여 개혁을 추진하게 하였다. 청이 이에 반발하자 일본은 아산만에 상륙해 있던 청군을 공격해 청・일 전쟁(1894~1895)을 일으켰다. 일본군은 성환 전투에 이어 평양 전투와 황해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청의 본토까지 진격하여 뤼순과 웨이하이웨이까지 점령하였다. 전쟁에서 패한 청은 일본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였다(1895). 이에 따라 청은 조선이 자주독립 국가임을 인정하고 일본에게 랴오둥반도, 타이완 등을 할양하고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하였다. 이후 일본은 제국주의 대열에 합류한 반면, 청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청・일 전쟁에서 승리를 굳힌 일본은 조선의 내정에 더욱 깊이 간섭하였다.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군 지도부는 일본을 몰아내기 위하여 재봉기를 계획하였다. 

 

 

 

 

제2차 봉기

     청과 벌인 평양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조선 정부군과 연합하여 농민군을 진압할 준비를 하였다. 이에 1894년 9월, 전봉준은 일본을 몰아낼 것을 주장하며 다시 봉기하였다. 제2차 봉기에는 최시형의 지시를 받은 북접도 참가하였다. 충청도 논산에서 전봉준의 남접과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의 주력 부대가 합세하였다.

     농민군은 충청도의 요충지 공주성을 점령한 후 서울로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농민군은 공주로 들어가는 길목 곳곳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때 전라도와 충청도는 물론 경상도, 강원도, 경기도, 황해도 등에서도 농민들이 봉기해 일본군에 협력하는 지방 관아를 습격하거나 일본 군용 전신선을 절단하는 등 일본군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동학 농민군의 주력 부대는 관군과 일본군의 근대식 무기와 전략을 이겨 내지 못하고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이후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 부대는 전라도 각지에서 농민군 진압 작전을 펼쳤고 양반, 향리들이 조직한 민보군도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우금치 전투 이후 농민군은 전열을 정비하면서 곳곳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계속해서 패배하였다. 태인 전투를 마지막으로 전봉준은 농민군 해산을 결정하였고, 결국 1894년 12월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 동학 농민군 지도자들이 체포되거나 처형되고, 이듬해 각지의 농민 봉기도 모두 진압되면서 동학 농민 운동은 끝이 났다.

 

동학 농민군 제2차 봉기 지도
출처: 동아출판 고등학교 한국사

 

 

 

 

동학 농민 운동의 의의

     동학 농민 운동은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 하에서 농민 스스로 봉건적 억압과 착취를 극복하려는 반봉건 운동이자,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워 나라를 지키려 한 반외세 운동이었다. 이들이 주장한 폐정 개혁의 요구는 이후 갑오개혁에 반영되어 새로운 사회 질서 성립을 촉진하였다. 한편 동학 농민군의 잔여 세력은 이후 전개된 항일 의병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항일 의병 투쟁으로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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