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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갑신정변

갑신정변

답례 사절단으로 미국에 갔다 돌아온 홍영식은 고종에게 근대적인 우편 제도를 실시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정부는 우편 업무를 관장하기 위해 우정총국을 설립하였다. 우정총국의 개국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리던 날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개화파 관리들은 정변을 일으켰다.

 

썸네일 갑신정변
갑신정변

 

개화파의 분열

    개화파 내에서는 개화의 개념과 방향을 두고 입장 차이가 있었다. 이는 임오군란 이후 더욱 확대되어 청과의 관계 설정, 개화의 속도와 방법에 대한 입장 차이로 개화파는 급진 개화파 온건 개화파로 나뉘었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을 중심으로 한 급진 개화파는 청의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 문명개화론을 내세운 일본의 메이지 유신처럼 서양의 과학 기술뿐만 아니라 사상과 제도까지도 수용하여야 조선이 근대 국가로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반면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 온건 개화파는 청과 전통적인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 개화를 추진하였다. 이들은 청의 양무운동을 본받아 기존 사회 제도와 문화를 유지하면서 서양의 과학 기술을 수용하자는 동도서기론을 주장하며 개혁을 추구하였다. 

     급진 개화파는 박문국을 설치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를 창간하고 도로 정비, 경찰・우편 제도의 도입에 앞장섰다. 그러나 청의 내정 간섭과 민씨 정권의 친청 정책으로 개화 정책은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였다. 한편, 민씨 정권과 묄렌도르프는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당오전을 발행하려 하였다. 이에 반대하여 김옥균은 개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에서 차관을 얻으려 하였다. 그러나 차관 교섭이 실패로 끝나면서 급진 개화파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졌다. 

 

 

 

 

갑신정변

     1884년, 청은 베트남을 둘러싸고 프랑스와 갈등이 높아지자 조선에 주둔한 병력 중 일부를 베트남으로 이동시켰다. 급진 개화파는 이 틈을 타 민씨 정권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고 일본 공사의 군사적 지원 약속을 받고 정변을 계획하였다.

      1884년에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 개화파는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반대파 인사들을 제거하고, 개화당 정부를 수립하였다(갑신정변). 개화당 정부는 개혁 정강을 발표하여 청과의 사대 관계를 청산하고 내각 제도를 확립하며,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권을 마련하여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겠다고 하였다. 또한 조세 제도 개혁, 재정의 일원화 등으로 재정을 확충하고, 군사・경찰・재판 제도의 개혁을 하고자 하였고, 혜상공국을 없애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청군의 공격으로 일본군이 약속을 어기고 철수하면서 개화당 정부는 3일 천하로 무너졌다. 급진 개화파의 주요 인물들은 일본 공사관에 피신해 있다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한성 조약과 톈진 조약

     갑신정변 이후 일본은 일본 공사가 갑신정변에 관여한 사실은 덮어 둔 채, 일본 공사관이 불타고 일본인 사상자가 생기자 조선에 피해 배상을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은 일본과 한성 조약을 맺고 배상금과 공사관 신축바를 받아냈다. 이어 일본은 청과 톈진 조약을 맺어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이후 군대를 파견할 경우에는 상대국에 미리 알리도록 하였다. 

     갑신정변은 청의 내정 간섭을 물리치고 자주적 근대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일어난 최초의 근대적 정치 개혁 운동이었으며, 이후 근대화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소수의 지식인이 중심이 된 위로부터의 근대화 운동으로 대다수의 관료와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또한, 자체 역량을 갖추지 못하고 일본의 군사적 지원에 지나치게 의존하였다.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대립 격화

     갑신정변 이후 대신들은 정변의 원인이 고종의 독단적인 정국 운영에 있다고 보고 이를 비판하였다.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한 고종은 내정과 외교를 담당하던 별도의 기구를 의정부로 통합하고 정국 운영권을 의정부로 넘기려 하였다. 청의 내정 간섭이 심해지자 고종은 청을 견제하려 비밀리에 조러 비밀 협약을 추진하는 등 러시아와 우호 관계를 강화하였다.

     이즈음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던 영국이 조선에 접근하는 러시아를 견제하려 거문도를 불법 점령하였다(거문고 사건, 1885). 조선은 청에 중재를 요청하였고, 영국은 조선에 진출하지 않겠다는 러시아의 약속을 받고 거문도에서 철수하였다. 이 과정에서 청의 내정 간섭은 더욱 심해졌다.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대립이 심해지자 독일의 부들러는 조선에 중립화안을 제안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국에서 돌아온 유길준도 열강에게 조선의 중립을 보장받아 독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중립화론'을 구상하였다. 

 

 

 

 

고종의 자주독립 정책

     이러한 상황에서 고종은 자주적 개화 정책을 펼쳤다. 내무부를 설치하여 군사, 재정, 외교 등의 업무를 맡게 하였고, 박문국을 다시 설치하여 한성주보를 간행하였다. 또한 화폐 주조 기관인 전환국과 조세곡 운반 기관인 전운국을 내무부에서 운영하였고, 육영 공원 연무 공원 등을 설립하여 외국인 교사와 군사 교관을 초빙하였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추진한 정부의 근대화 정책은 농민의 조세 부담을 높였다.

     고종은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일본, 미국에 공사관을 설립하는 등 외교 활동을 통해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러나 독립 국가로서의 위상을 강조하려는 고종의 토력은 청의 압력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