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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갑오개혁

갑오개혁

 

썸네일 갑오개혁
갑오개혁

 

군국기무처 설치와 제1차 갑오개혁

     조선 정부는 농민군과 전주 화약을 체결한 이후 교정청을 설치하여 독자적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한 뒤 흥선 대원군을 섭정으로 하는 김홍집 내각을 세웠다. 김홍집 내각은 교정청을 폐지하고, 개혁 추진 기구로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였다. 군국기무처는 일본이 청・일전쟁으로 조선에 개입하기 어려운 틈을 타 갑신정변의 개혁안과 동학 농민 운동의 요구를 반영하여 개혁 법안을 제정・공포하였다(제1차 갑오개혁, 1894).

     정치 분야에서는 중국의 연호 대신 개국 기년을 사용하였다. 궁내부를 설치하여 왕실과 정부 사무를 분리하고 국왕의 권한을 제한하였다. 기존의 6조를 8아문으로 개편하였고, 경무청을 중심으로 하는 경찰 제도를 도입하였다. 또한 사간원을 비롯한 언론 기관과 과거제를 없앴다. 한편, 토지・산림・광산을 외국인에게 매매하지 못하게 하였으나 일본에게는 경부선 부설권을 넘겨주기로 하였다.

     경제 분야에서는 재정을 탁지아문으로 일원화하고, 여러 조세 항목을 지세와 호세로 통합하였다. 조세 금납제를 시행하고, 이를 위해 은본위 화폐 제도를 도입하여 은화와 동전을 발행하였다. 

     사회 분야에서는 신분 차별을 없애고 노비제를 폐지하였다. 조혼을 금지하고, 과부의 재가를 허용하였으며, 참형과 가혹한 고문 및 연좌제도 폐지하였다. 또한 의사소통을 쉽게 하기 위해 공문서에 국문 또는 국한문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대원군의 실각과 제2차 갑오개혁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자 조선의 내정에 적극 간섭하였다. 일본은 흥선 대원군을 물러나게 하고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를 불러들였다. 이후 구성된 김홍집・박영효 연립 내각은 군국기무처를 폐지하고 제2차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다. 1894년 12월, 고종은 종묘에서 자주독립의 맹세를 하고 국정 개혁의 기본 강령은 홍범 14조를 반포하였다. 이를 통해 청에 의존하는 관계를 끊고 국내외에 자주독립을 선포하였다.

     정치 분야에서는 통치 구조를 국왕 중심에서 내각 중심으로 바꾸었다. 8아문을 7부로 고쳐 내각을 편성하고 내각 총리대신이 통할하게 하였다. 지방 행정은 8도를 23부로 개편하고, 부・목・군・현 등을 군으로 통일하여 23부에 소속시켰다. 기존의 군사 조직을 폐지하고 중앙에 훈련대를 두었는데 고종은 별도로 시위대를 창설하여 궁궐 호위를 전담시켰다. 또한 정부 기관마다 행사하던 재판권을 재판소로 단일화하여 지방 재판소, 한성 재판소, 고등 재판소, 특별 법원 등을 설치하였다.

     경제 분야에서는 근대적 예산 제대롤 도입하고, 관세사와 징세서를 설치하여 조세 징수 업무를 맡도록 하였다. 육의전과 공납제를 폐지하였고, 독점 상업권을 지니고 있던 보부상 단체인 상리국도 없앴다.

     사회 분야에서는 교육입국 조서를 반포하고 한성 사범 학교 관제, 소학교 관제, 외국어 학교 관제 등을 발표하였다. 

 

 

 

 

명성 황후 피살(을미사변)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에게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타이완과 랴오둥 반도를 할양받았다. 하지만 만주에서 세력을 키우던 러시아는 이 소식을 듣고 프랑스, 독일과 함께 일본의 랴오둥 반도 점유가 동아시아 평화를 위협한다고 일본을 압박하였다(삼국 간섭, 1895). 그 결과 일본은 랴오둥반도를 청에 돌려주는 대신 보상금을 받았다.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 간섭에 일본이 굴복하는 것을 본 고종과 명성 황후는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의 압력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박영효가 명성 황후 폐위 음모 혐의로 일본에 망명하자 고종은 박정양, 이완용 등 친러・친미적인 인물로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은 조선 공사로 군인 출신인 미우라 고로를 파견하였다. 미우라 공사는 일본군 수비대와 일본인 낭인, 해산당한 훈련대 무관 등을 경복궁에 침입시켜 명성황후를 살해하였다(을미사변, 1895).

 

 

 

 

제3차 개혁(을미개혁)

     을미사변 이후 친일적인 김홍집, 유길준 등 친일 관료로 구성된 내각은 훈련대를 해산하고 중앙에 친위대, 지방에 진위대를 신설하였다. 정부의 권위를 세우고자 국호를 '대조선 제국'으로, 대군주를 '황제'로 바꾸려 하였으나 열강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이 시기 태양력과 '건양' 연호를 사용하였고, 종두법과 단발령을 실시하였다. 중단되었던 우편 사무도 다시 실시하였다. 정부의 개혁과 을미사변, 단발령 시행에 반발해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일본의 위협을 느끼던 고종은 의병 봉기로 궁궐 경비가 약화된 틈을 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아관 파천, 1896). 그 결과 김홍집 내각은 무너졌고, 일부 관료가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개혁은 중단되었다. 

     갑오개혁은 봉건적 통치 체제를 개혁하려 한 근대적 개혁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간섭 속에 추진되었고, 국방력 강화와 공업 진흥 등에 소홀하였다는 한계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