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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독립 협회

독립협회 

고종은 대한 제국을 선포하면서 청의 예속국으로서의 '조선 국왕'이 아닌 '황제'를 나타내는 국새 10과를 새로 만들었다. 그중 하나인 황제지보는 손잡이의 형태를 이전의 거북이 모양에서 황제를 상징하는 용 모양으로 바꾸어 만들었다. 대한 제국의 국새는 6・25 전쟁 때 일부가 국외에 불법 반출되었다가 2014년에 환수되었다.

 

썸네일 독립 협회
독립 협회

 

독립 협회의 설립

     아관 파천 이후 러시아는 조선에 영향력을 강화하면서 각종 이권을 침탈하였다. 다른 열강도 기회균등을 요구하며 조선의 이권을 침탈하였다.

     갑신정변 이후 망명 중이던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이 민중 계몽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정부의 지원을 받아 1896년 한글판과 영문판으로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개화 관료, 지식인과 함께 독립 협회를 창립하였다. 독립 협회는 조선 독립의 상징으로 독립문을 건립하였는데, 독립문 건립에 필요한 기금을 내면 누구나 독립 협회의 회원이 될 수 있도록 하여 관료와 학생, 교사, 상인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였다.

     이후 독립 협회는 독립문을 세우고 독립관에서 다양한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토론회의 주제는 초기에는 교육 진흥, 산업 개발, 미신 타파 등 계몽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었고, 갑오개혁 때 정해진 국기의 게양을 주장하고, 애국가를 제정하여 보급하려 하였다.

 

독립신문 사진
출처: 동아출판 고등학교 한국사

 

 

 

 

대한 제국의 수립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고종은 단발령을 철회하고 의병의 해산을 권요하였다. 이어 친러・친미 성향의 인물로 정부를 구성한 후 내각을 폐지하고 의정부를 설치하되 국왕이 최종 결정권을 가지도록 하였다. 지방 행정 구역도 23부에서 13도로 바꾸었다. 고종은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였으나 러시아는 겨우 군사 교관의 파견 요청에만 응하였다. 러시아와 일본은 조선을 둘러싸고 두 차례의 비밀 협정을 체결하여 조선을 두 나라의 공동 세력권으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상소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고종은 친위대의 경비 능력이 갖추어진 후인 1897년 2월, 아관 파천 이후 1년 만에 경운궁(덕수궁)으로 돌아왔다. 이후 조선도 황제 칭호를 사용하여 국가 위상을 높여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고종은 연호를 '광무'로 바꾸고 환구단에서 황제로 즉위한 뒤 나라 이름을 '대한 제국'으로 선포하였다. 이 무렵 러시아는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해 대한 제국이 요청한 군사 교관을 증파하고, 재정 고문을 파견하였다. 

 

 

 

 

독립 협회의 국권 수호와 개혁 운동

    대한 제국이 수립될 무렵 러시아는 정부와 교섭하여 재정 고문을 파견하고, 한러 은행 설립, 부산의 절영도를 조차해 줄 것을 요구하며 이권 침탈을 시도하였다. 독립 협회는 이를 국가 주권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 1898년 3월부터 종로에서 상인, 학생 등 1만여 명이 참여한 만민 공동회를 열어 러시아의 침략 행위를 비판하고 러시아의 요구를 거절할 것을 결의하였다. 만민 공동회의 결의를 토대로 고종이 러시아에 완강한 태도를 보이자, 러시아는 군사 교관과 재정 고문을 철수하고, 절영도 조차 요구도 철회하였다.

     만민 공동회를 통해 러시아의 이권 침탈을 저지한 뒤 민중은 점차 다양한 부문으로 관심을 넓혔다. 1899년 중반 이후 독립 협회는 신체의 자유, 재산권 보호,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요구하였고, 정부 대신의 부정부패 등을 비판하면서 황제 권력을 제한하고자 하였다. 황제 측근인 이용익에게는 백동화를 남발한 죄를 물어 고등 재판소에 고발하였다. 또한 정부가 갑오개혁 때 폐지된 연좌제 등을 부활하려 하자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가족까지 죽이는 노륙법 부활 저지 운동 등을 강력하게 전개하였으며 민의를 반영하기 위한 의회 설립 운동도 함께 벌였다. 그리고 외국에 이권을 넘기고 민권을 제한하려는 보수적인 관료들을 퇴진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박정양을 수반으로 하는 내각이 수립되었다.

 

 

 

 

독립 협회의 중추원 개편

     독립 협회는 박정양 내각과 협의하여 의회 설립과 내정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황제의 자문 기관인 중추원을 의회 기능을 갖춘 조직으로 개편하여 입헌 군주정 체제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독립 협회는 1898년 종로에서 정부 관료와 민중이 함께 참여하는 관민 공동회를 개최하고, 여기서 결의된 헌의 6조를 고종에게 건의하였다. 고종이 이를 승인하면서, 새로운 중추원 관제가 반포되었다. 이에 따라 중추원은 입법권, 정부 안건 심사권, 정부 정책 자문권 등을 행사할 수 있었다. 또한 국정 중요 사항에 대해서는 중추원이 합당하다고 결정하기 전까지 행정부가 단독으로 집행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중추원 의관 50명 중 절반은 정부가 황제에게 추천하여 임명하고 나머지는 독립 협회에서 선출하도록 하여 국민의 의사가 정치에 반영되도록 하였다. 

 

 

 

 

대한 제국의 독립 협회 해산

     중추원 제도가 개편되자, 독립 협회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에 위기를 느낀 보수 세력은 독립 협회가 황제를 폐위하고 공화정을 수립하려 한다고 모함을 하였다. 이에 고종은 독립 협회의 해산을 명령하고 주요 간부를 체포하였으며, 개혁적인 관료들을 파면하였다.

     이에 학생과 상인 등 수천 명이광화문과 종로 일대에서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고 철야 시위를 전개하여 정부에 독립 협회 간부를 석방하고 헌의 6조를 실천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놀란 고종은 독립 협회의 간부들을 석방하였으나 만민 공동회는 헌의 6조의 실시, 독립 협회의 재설립을 계속해서 요구하였다.

     시위가 계속되자 정부는 황국 협회를 시켜 전국의 보부상을 한성으로 불러들여 만민 공동회를 습격하게 하였다. 치열한 싸움이 일어나 부상자가 생겼다. 고종은 독립 협회와 황국 협회의 대표를 만나 그들의 요구를 들은 뒤 독립 협회를 다시 설립하고 보부상을 해산시킬 것을 약속하였다. 이어 중추원 관제를 다시 고쳐 황제 측근이 과반수를 차지하게 하였으나, 그 이후 개최된 중추원 회의에서 국정을 개혁할 대신 후보로 일본에 망명 중인 박영효가 추천되었다. 이를 자신의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 분노한 고종은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 공동회를 해산하였다. 그리고 모든 정치 집회를 금지하고, 독립 협회를 해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