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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대한 제국과 광무개혁

대한 제국 정부의 개혁 추진 

대한 제국은 1900년 4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만국 박람회에 참여하여 한국관을 세웠다. 한국관의 주전시관은 경복궁의 근정전을 재현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전시관 내부에는 신발, 모자, 비단 제품, 악기 등 다양한 공예품이 전시되어 세계인의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전시된 물품은 막대한 수송비 부담으로 인해 대한 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썸네일 대한 제국과 광무개혁
대한 제국과 광무개혁

 

대한국 국제 반포

     독립 협회 해산 이후 대한 제국은 황실 중심의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1899년 8월에는 대한국 국제를 반포하였다. 대한국 국제에는 '대한국은 세계 만국에 공인된 자주독립국이며, 만세토록 불변할 전제 정치'라고 하는 규정을 명문화하였다. 또한, 황제가 육해군 통솔권,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 등 모든 권한을 가진다고 규정하여, 대한 제국이 전제 군주 국가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후 대한 제국은 한국 역사상 최초로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대한국・대청국 통상 조약을 체결하였다.

 

 

 

 

대한제국, 광무개혁 추진

     대한 제국은 갑오개혁의 급진성을 비판하면서 '옛것을 기본으로 하고 새로운 것을 참고한다.'는 구본신참을 개혁의 기본 방향으로 정하여 점진적으로 개혁을 추진하였다(광무개혁).

     군사적으로는 원수부를 설치하고 황제가 대원수로서 국방과 군사에 관한 명령을 직접 장악하도록 하였다.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 중앙의 친위대 병력을 늘리고, 시위대를 확대하였으며, 지방의 진위대 병력도 늘렸다. 신식 군대의 장교를 육성하기 위해 무관 학교도 설립하였다. 그리고 해군을 창설하여 근대식 군함을 도입하기도 하였다. 또한 황실 경찰 기구로 경위원을 설치하여 일본에 망명 중인 박영효, 유길준 등과 연계된 국내 세력의 정변 음모를 막고자 하였다. 

     근대적인 토지 제도와 지세 제도를 확립하고, 개혁 정책 추진에 필요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양전 사업지계 발급 사업을 실시하였다. 이를 위해 양지아문을 설치하여 1898년부터 1904년까지 전국 토지의 약 3분의 2를 측량하고 토지 소유자를 조사하였다. 양전 사업은 농지만을 조사하던 이전과는 달리 모든 종류의 토지를 조사 대상에 포함하였다. 그리고 지계아문을 설치하여 토지 소유자에게 소유 증명서인 지계를 발급하였다. 또한 개항장 이외의 지역에서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금지하여 토지 약탈에 열을 올리던 제국주의 열강을 견제하려 하였다.

     상공업을 진흥하기 위한 정책도 시행되었다. 섬유, 운수, 광업, 철도 등의 분야에서 근대적 공장과 회사가 설립되었으며 한성은행, 대한천일은행 등 금융 기관도 세워졌다. 전화를 가설하고, 우편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전차・철도를 부설하는 등 근대적인 교통・통신 시설도 도입되었다. 또한, 대한 제국은 상공업 진흥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상공 학교와 광무 학교 등을 세웠고, 유학생을 파견하여 서양의 근대 기술을 배워 오도록 하였다. 한편, 1902년부터 일본 제일 은행이 한국에서 제일 은행권을 발행하자 정부는 유통 반대 운동을 벌이고 중앙은행을 설립하여 금본위 지폐를 발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는 러일 전쟁이 일어나면서 중단되었다. 

    이와 같이 대한 제국은 근대적 토지 소유권 확인, 상공업 진흥 등에 힘썼으나 집권 세력의 부정부패와 열강의 간섭으로 근대 국민 국가를 이끌 만한 개혁은 성취하지 못하였다. 

 

 

 

 

민중의 저항

     근대화 정책이 실시되는 가운데 농민들은 토지 측량과 조세 징수 등의 과정에서 수탈을 당하였다. 이에 전국 곳곳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동학 농민군의 잔여 세력은 '영학당'이라는 조직을 결성하고 1899년 경 봉기를 일으켰다. 이들은 전라도 고부・흥덕・무장군 일대를 장악하였으니 곧 관군에게 진압되었다. 또한 일부 가난한 농민과 상민은 1900년 전후 '활빈당'을 조직하여 경기도・충청도・경상도・전라도 등지에서 부호의 재물을 빼앗거나 관청을 습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