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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항일 의병 운동과 의열 투쟁

항일 의병 운동과 의열 투쟁의 전개 

의병에는 어린 소년, 유생, 포수, 상인, 군인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당시 영국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을 이기기는 힘들다는 것을 압니다. 어차피 싸우다 죽겠지요. 그러나 일본의 노예로 사느니 자유인으로 죽는 것이 낫습니다."라며 결연한 의지를 보여 주었다.  

 

썸네일 항일 의병 운동과 의열 투쟁
항일 의병 운동과 의열 투쟁

 

단발령과 의병 봉기

     을미사변과 단발령 강제 시행으로 쌓여 왔던 반일 감정이 폭발하면서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을미의병, 1895). 을미의병은 유인석, 이소응, 김도화 등 위정척사 사상에 바탕을 둔 반일 의식을 가진 유생층이 주도하였으며, 농민, 포수, 동학 농민군의 잔여 세력 등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각지에서 일본군을 공격하고, 지방 관청을 공격하여 친일 관리를 처단하였다. 

     을미의병은 아관 파천 이후 고종이 단발령을 철회하고 의병 해산 조칙을 내리면서 대부분 해산하였다. 의병들은 대부분 활동을 중단하였으나 일부 농민과 의병 잔여 세력은 활빈당, 영학당 등을 조직하여 반침략・반봉건 활동을 계속하였다. 

 

 

 

 

을사늑약과 의병 재기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고, 을사늑약으로 대한 제국이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기자 다시 의병이 일어났다(을사의병, 1905). 이 시기 의병 운동은 위정척사를 넘어 점차 국권 회복 운동의 성격을 띠기 시작하였다. 

     전직 관료인 민종식, 최익현 등이 국가 존폐의 위기의식을 느끼고 봉기하였는데, 민종식은 천여 명의 의병 부대를 이끌고 일본군과 교전하여 홍주성을 점령하였으나 일본군의 반격으로 후퇴하였다. 최익현은 태인에서 봉기하여 순창을 점령하였으나 관군이 파견되자, 같은 나라의 군대와는 싸울 수 없다면서 군사를 물리고 체포되었다. 이후 최익현은 쓰시마섬에 유배되어 순국하였다.

     이 시기에는 유생뿐만 아니라 평민 의병장이 이끄는 부대가 큰 전과를 올렸다. 신돌석이 이끄는 의병 부대는 경상북도 내륙과 동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일본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펼쳐 큰 전과를 올렸다. 

 

 

 

 

정미7조약과 의병의 확산

     1907년에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하고, 뒤이어 대한 제국의 군대가 해산되면서 의병 운동은 새로운 모습을 띠었다. 해산 군인이 의병에 참여하면서 의병의 조직력과 전투력이 한층 강화되었고, 전국적인 의병 전쟁으로 발전하였고(정미의병), 의병 투쟁도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의병 주도 계층도 다양해져서 양반 유생과 전직 관료 외에도 농민, 군인 등 평민 의병장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의병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이인영 총대장으로 하는 13도 창의군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각국 영사관에 의병을 국제 공법상의 교전 단체로 인정해 주기를 요청하였으며, 재외 동포에게도 격문을 보냈다. 1908년에는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여 서울 진공 작전을 벌여 선발대가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하였으나, 일본군의 공격에 패하면서 작전은 실패하였다. 서울 진공 작전이 실패한 뒤에도 의병은 전국 각지에서 끈질긴 투쟁을 이어 가며 일본군에 타격을 주었다. 

     이후에도 의병들은 전국 각지에서 끈질기게 투쟁을 계속하였다. 이들은 일본의 침략과 관련된 우편 취급소, 금융 조합, 철도, 전선 등을 파괴하였고, 일본에 협조하는 일진회원, 헌병 보조원 등도 공격하였다.

 

 

 

 

일본의 의병 진압

     1909년에 접어들면서 의병 운동은 점차 약화되었지만, 호남 지역에서는 여전히 의병 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에 일본은 병력을 호남에 집중하여 의병의 근거지를 포위 공격하는 '남한 대토벌' 작전을 전개하였다. 의병 부대의 근거지가 될 만한 촌락과 가옥을 초토화하고 양민을 학살하였고(1909), 수많은 의병이 체포되거나 순국하였다.

     일본군의 계속된 공격으로 의병의 국내 활동이 어려워지자, 의병 중 일부는 간도와 연해주 등지로 이동하여 무장 독립 투쟁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국내에서 계속 항쟁을 이어가는 의병도 있었다. 

 

 

 

 

의열 투쟁의 전개

     을사늑약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인들은 사실상 국권을 빼앗긴 것으로 인식하여 거국적인 을사늑약 반대 투쟁을 펼쳤다. 

     전국에서 전・현직 관료와 유생들이 을사늑약의 폐기와 을사5적의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계속해서 올렸다. 여러 차례의 상소에도 성과가 없자, 민영환과 조병세, 홍만식, 송병선 등 많은 애국지사가 자결하여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언론도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직접 규탄하거나, 을사늑약에 저항하는 한국인의 소식을 실어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였다.

     대한 제국의 국권 침탈과 관련된 인물들을 직접 응징하는 의거도 잇따랐다. 기산도 등이 을사5적을 처단하기 위한 결사대를 조직하다가 사전에 체포되었고, 나철(나인영), 오기호 등은 자신회를 조직하여 을사 5적을 처단하기 위한 활동을 하였다. 장인환전명운은 일본의 대한 제국 침략을 지지하고 미화하였던 스티븐스를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살하였다(1908).

    한편 두만강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하던 안중근은 러시아와 만주 문제를 협상하기 위해 하얼빈에 온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처단하였다(1909). 안중근은 재판에서 평화를 교란한 일본의 침략 행위를 '동양 평화론'에 입각하여 비판하였다. 이재명은 친일 매국노를 처단하는 것이 국권을 지키는 것이라 여기고, 명동 성당 앞에서 을사늑약과 한・일 신협약 체결을 주도하였던 이완용을 저격하여 큰 부상을 입혔다(1909). 이러한 의열 활동은 일제의 한국 침략에 대한 부당성을 국외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