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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애국 계몽 운동

애국 계몽 운동 

1905년 평양에서 설립된 태극 서관은 이승훈을 중심으로 한 민족 운동가들이 신지식을 보급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운영한 서점으로 지식인들이 국권 회복을 위한 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썸네일 애국 계몽 운동
애국 계몽 운동

 

보안회와 헌정 연구회

     을사늑약을 전후하여 일본의 내정 간섭이 심화되자, 독립 협회 계열의 개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실력을 키워 국권을 회복하자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들은 사회 진화론을 받아들여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기르고, 신문과 잡지를 발간하는 등의 활동으로 국민을 계몽하고, 산업을 진흥하여 경제적인 실력을 키우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움직임을 통틀어 애국 계몽 운동이라 한다.

     그 최초의 움직임은 1904년 관료와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보안회의 활동이었다.  러・일 전쟁 당시 일본은 토지를 약탈하기 위해 대한 제국에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하였는데, 보안회는 종로에서 대중 집회를 열어 일본의 요구를 좌절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일본의 압력으로 보안회는 해산되었지만, 보안회가 이룬 성과는 이후 일본의 국권 침탈에 맞서 많은 단체가 설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일진회가 초기에는 민권 운동을 전개하다가 친일적 성향을 나타내자,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국권 수호와 독립 유지를 목적으로 독립 협회를 계승한 헌정 연구회가 조직되었다(1905). 헌정 연구회는 서구 열강이 부강한 요인은 입헌 체제에 있다고 보고 헌법 제정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또한, 한국이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선언서를 발표한 일진회를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하지만 을사늑약 반대 입장을 밝힌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활동이 중단되었다.

 

 

 

 

대한 자강회와 지역 학회

     을사늑약 이후 헌정 연구회가 해산되자, 그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1906년에 대한 자강회를 조직하였다. 대한 자강회는 교육과 산업의 발달을 이루고 입헌 군주제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전국에 지회를 두고 월보를 발행하는 한편, 정기적으로 연설회를 여는 등 활발한 계몽 활동을 펼쳤다. 대한 자강회는 고종 강제 퇴위 반대 운동을 벌이다 통감부의 탄압을 받아 강제로 해산되었다.

     이후 대한 자강회의 주요 인사들은 천도교 간부들과 대한 협회를 조직하였다(1907). 대한 협회는 실력을 길러 점진적으로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입헌 군주정을 지향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활동이 크게 약화되었다. 

    애국 계몽 운동가들은 국권 회복을 위해서는 민중 계몽과 근대 교육 보급이 가장 시급하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전국 주요 지역에서는 학교 설립과 대중 계몽을 목표로 한 애국 계몽 운동 단체가 설립되었다. 호남 학회, 호서 학회, 서북 학회, 기호 흥학회, 교남 학회, 관동 학회 등이 월보를 발행하고, 강연회를 여는 등 대중을 계몽하였다. 그리고 신교육 보급을 위해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국권 회복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였다. 통감부는 사립학교령과 학회령, 출판법, 보안법 등으로 이러한 움직임을 탄압하였다.

     언론사의 활동도 활발하였다. 황성신문은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어 을사늑약을 강하게 비판하였으며,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의 침략 행위를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의병 활동에 호의적인 보도를 하여 대중의 애국심을 높였다. 일본은 이를 막기 위해 신문을 검열하고, 신문지법을 제정하여 언론을 탄압하였다. 

     일본의 탄압이 심해지자 일부 애국 계몽 운동가는 일본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실력 양성에 집중하였다. 이들은 실력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일본에 대한 직접적인 투쟁은 무모하다고 판단하여 의병 운동을 비판적으로 보기도 하였다.

 

 

 

 

비밀 결사 신민회

     을사늑약 이후 통감부의 억압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1907년에 안창호와 양기탁의 주도로 비밀 결사인 신민회가 조직되었다. 신민회는 교육과 산업의 진흥, 국민 계몽 등을 통한 민족의 실력 양성을 강조하고, 국권 회복과 공화정에 바탕을 둔 근대 국민 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였다. 다양한 계층이 참여한 신민회는 이를 실현하고자 정주에 오산 학교, 평양에 대성 학교 등을 설립하여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고, 서적을 출판하고 공급하기 위해 태극 서관을 운영하고, 자기 회사를 설립하여 민족 산업을 육성하였다. 

    1909년 무렵부터 일본의 국권 침탈을 본격화하자 신민회는 실력 양성 운동만으로는 국권을 회복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따라 독립 전쟁 전략을 수립하고, 국외에 독립군 기지와 무관 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이회영 등 많은 회원이 만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한편 일제의 한국 강제 병합 이후 신민회의 국내 조직은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와해되었다. 그러나 신민회에 참여하였던 애국지사들은 이후에도 나라 안팎에서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