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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열강의 경제 침탈

열강의 경제 침탈 가속화 

개항 이후 금은 대외 무역에서 주요한 결제 수단이었다. 평안도 운산 금광에는 금 매장량이 많았고, 미국은 이 금광의 채굴권을 확보하여 금광을 본격적으로 개발하였다. 이미 이곳에서 광산을 개발하던 조선인 광산 주인과 노동자들을 강제로 쫓겨났고, 미국인 광산 관리인이 조선인 농민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썸네일 열강의 경제침탈
열강의 경제 침탈

 

개항과 일본 상인의 무역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이후 부산, 원산, 인천이 차례로 개항되었다. 이 지역에는 외국인과의 무역을 허용한 개항장이 형성되었고, 이들 개항장에는 외국인 거류지인 조계가 형성되었다. 이 시기 외국 상인은 개항장 10리 이내에서만 무역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거류지 무역이 이루어지면서 외국 상인을 상대로 매매를 주선하는 객주 등 조선의 일부 중간 상인이 부를 축적하기도 하였다. 

     개항 초기에는 일본 상인을 중심으로 무역이 이루어졌다. 일본 상인들은 조선 상인들과 거래하면서 불법 행위를 일삼았지만, 강화도 조약에 명시된 영사 재판권을 이용하여 조선 관리의 처벌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조・일 수호 조규 부록이 체결되면서 일본 상인들은 개항장에서 일본 화폐를 이용하여 물건을 구매할 수 있었다.  또한 조・일 무역 규칙으로 일본 상선은 선박의 크기에 따라 정해진 항세를 부과받았으며 일본 정부 소속의 선박은 항세를 면제받았다. 이후 수출입 물품에 대해서는 관세를 부과받지 않는 등 매우 유리한 조건에서 무역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반면 조선은 무관세 무역을 허용하면서 재정 수입과 국내 산업을 보호할 장치를 잃어버렸다.

     일본 상인은 청일 전쟁 이전까지는 주로 영국산 면제품을 싸게 사서 조선에 들여와 비싼 가격에 판매하고 쌀, 콩, 소가죽 등을 사들여 일본으로 가져갔다. 일본과의 교역은 조선의 일부 지주에게는 곡물을 팔아 부를 축적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일본 상인이 대량으로 곡물을 사들이면서 대다수 백성은 곡물 가격이 올라 고통을 겪었다. 조선의 전통적인 면제품은 가볍고 입기 편한 외국산 면제품이 들어오면서 점차 판매량이 줄어들었고 이로 인해 조선 면방직 수공업은 타격을 입었다.

     한편 일본 상인들이 조선에서 쌀을 사들여 가면서 일본의 곡물 가격은 낮아졌다. 낮아진 곡물 가격으로 일본은 노동자의 임금을 낮게 유지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산업화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 

 

 

 

 

청・일본 상인의 상권 침탈

     임오군란 이후 조선은 청과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을 체결하여, 조선이 강력하게 요구하던 관세 부과와 방곡령을 수용하는 대신, 최혜국 대우 조항을 관철하여 청 상인은 허가를 받으면 개항장 밖에서도 활동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후 청과 일본 상인이 경쟁적으로 한성에 들어와 장사를 하였다. 이들은 국제 무역뿐만 아니라 조선의 국내 상업 활동에까지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개항장이나 내륙 지방에서 시전 상인의 전매 상품을 구입하여 직접 판매하는 등 유통망을 잠식해 갔다. 그 결과 한성의 시전 상인과 거류지 무역을 기반으로 성장하던 개항장 객주는 큰 타격을 받았다.

     청과 일본 상인은 본국의 지원을 받으며 상권을 넓혀 나갔다. 청과 일본이 조선에 주로 판매한 것은 영국산 면제품이었다. 청 상인은 상하이에서 구입한 영국산 면제품을 조선에 바로 판매할 수 있어, 유통 경로가 복잡하였던 일본 상인보다 가격 면에서 우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이 더욱 강해지면서 청 상인은 조선에서 더욱 쉽게 활동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청・일 전쟁 직전에는 조선의 수입액에서 청과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이 비슷해졌다. 그러나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일본 상인의 세력이 강화되었다. 청・일 전쟁 이후 일본에서는 섬유 공업이 발달하였고, 일본 상인들은 일본산 면직물을 조선에 들여와 싸게 팔았다. 이에 따라 조선의 면방직 공업은 더욱 몰락해 갔다. 

     한편, 조선 정부는 조・일 무역 규칙 이후 무관세 규정을 시정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개정된 조・일 통상 장정(1883)을 체결하여 개항장에서 관세를 부과하고 곡물 수출의 금지 조항을 넣었다. 그러나 이 조약에는 1개월 전 통고라는 단서 조항이 있어 방곡령을 둘러싼 분쟁의 여지를 남겨 두었고, 일본의 요구로 최혜국 대우 규정도 포함되었다. 

 

 

 

 

열강의 이권 침탈

     아관 파천 이후 제국주의 열강은 본격적으로 조선의 이권을 침탈하였다. 제국주의 열강은 왕실을 보호해 주겠다며 접근하였고, 고종도 열강의 보호를 기대하며 이권을 넘겨주었다.

     러시아는 조선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여 군사・재정 분야에 고문을 앉히고 광산, 삼림 등 각종 이권을 침탈하였다. 미국도 운산 금광 등 광산 채굴권을 비롯하여 철도・전기・전차 등 많은 이권을 차지하였다. 미국이 광선 채굴권을 획득한 이후 영구, 독일, 프랑스도 최혜국 대우를 이용하여 광산 채굴권 획득에 열을 올렸다.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 침탈은 조선의 자본 형성 기반을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이권 침탈 과정에서 수많은 삼림이 훼손되고 농민의 토지까지도 침탈되었다. 이러한 열강의 이권 침탈로 생계를 위협받은 한국인들은 이에 항의하여 시설을 파괴하거나 기존 생업권 보장,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일본은 청・일전쟁 이후부터 이권 침탈에 열을 올렸다. 1898년부터는 열강이 차지하고서도 미처 손대지 못한 각종 이권을 사들이거나 넘겨받았으며, 새로운 이권을 차지하였다. 일본은 한국 침략과 경제 침탈을 위해 철도 부설에 관심을 기울여, 미국이 가지고 있던 경인선 철도 부설권을 사들이고 경부선 철도 부설권을 획득하였다. 러・일 전쟁 직후에는 군사적으로 이용할 목적으로 프랑스가 반환한 경의선 철도 부설권을 강탈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한국 농민의 토지를 싼값으로 수용하거나 한국 정부로부터 철도 부지를 무상으로 제공받았고, 한국인을 공사 현장에 강제로 동원하였다. 일본은 이렇게 건설한 철도를 이용하여 대한 제국의 곡식과 상품을 부산항으로 집결시켜 일본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러・일 전쟁과 항일 의병 운동 탄압에 필요한 군 병력을 이동하였다. 

 

열강의 이권침탈 지도
출처: 동아출판 고등학교 한국사

 

 

 

 

일본의 금융 지배와 토지 수탈

     개항 이후 일본은 조선의 금융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일본이 제일은행은 조선의 해관세를 취급하였고, 조선의 국고금을 이용하여 금융 면에서 일본 상인의 조선 진출을 지원하였다. 일본의 다른 은행도 조선에 진출하여 금융을 장악해 갔다.

     제1차 한・일 협약으로 대한 제국의 재정 고문이 된 메가타는 대한 제국의 금융을 장악하기 위해 전환국을 폐쇄하고, 이어 1905년에는 화폐 정리 사업을 추진하였다. 화폐 정리 사업으로 백동화와 구화폐는 제일은행권으로 교환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백동화의 가치가 2분의 1 이하로 평가 절하되거나 교환이 거부되기도 하였다. 이 결과 많은 상공업자들이 몰락하였다. 그리고 일본 제일은행권이 대한 제국의 법화의 역할을 하게 되어 일본은 대한 제국을 식민지로 지배하기 위한 경제적 기초를 확보하였다. 또한, 메가타는 국구의 출납 업무를 일본 제일은행이 담당하게 하여 대한 제국의 재정을 장악하였다. 

     한편 을사늑약 이후 통감부는 재정 운영의 목표를 식민지화의 기초를 닦는 데 두고 전국에 재무서와 재무 감독국을 설치하고 징세 업무를 맡게 하여 정부 재정을 장악하였다. 황실 재정의 주된 수입원이었던 역에 딸린 토지의 소작료와 홍삼 전매 수입도 국유화하여 정부 재정으로 통합하였다. 또한 세금 징수를 강화하였으며 도로와 항만 건설, 항일 의병 운동 탄압을 위한 예산을 확대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필요한 비용은 일본에서 도입한 거액의 차관으로 충당하게 하여 대한 제국의 재정을 일본에 예속시켰다.

     한편, 일본인들은 상권이 개항장 밖으로 확대되면서 고리대금 등의 방법으로 한국의 토지를 사들였다. 외국인이 허가 없이 토지를 매매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일본인들은 군산・나주 등 곡창 지대에 대규모 토지를 구입하여 농장을 경영하였고, 일본 정부는 이를 배후에서 권장하고 일본인의 이주를 돕기 위해 이민법을 개정하였다. 일본은 러・일 전쟁 직후 철도 부지와 군용지 확보를 명목으로 대한 제국의 국유지를 약탈하고 민간인 토지를 강제로 수용하였다. 또한,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하였으나 보안회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이후 일본은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금지하는 대한 제국의 법령을 무효화하고, 일본인의 토지 소유를 합법화하였다. 그리고 1908년에 동양 척식 주식회사를 세워 약탈한 토지를 일본인에게 매매・양도하거나 한국인에게 소작시켜 식민지 지배의 토대를 닦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