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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경제적 구국 운동

상공업 진흥과 경제적 구국 운동 

대한 제국이 일본의 강요로 들여온 차관 1,300만 원은 당시 대한 제국의 세출 예산 총액의 약 131%에 해당하였다. 또한 1910년대 초 우리나라 일용직 노동자의 한 달 급료가 약 20원이었던 것에 비교해 보면, 1,300만 원은 노동자 약 65만 명의 한 달 급료에 해당한 금액이기도 하였다. 이에 우리 민족은 일본의 차관을 갚자는 경제적 구국 운동을 벌였다.

 

썸네일 경제적 구국 운동
경제적 구국 운동

 

방곡령 실시

     개항 이후 일본이 조선에서 가장 많이 수입한 것은 곡물이었다. 이 때문에 국내 곡식 가격이 올랐으며, 특히 흉년에는 국내의 곡식 가격이 폭등하고 식량 사정이 악화되었다. 식량 사정이 악화하자 지방관들은 1883년에 개정된 조・일 통상 장정에 근거하여 방곡령을 내려 곡물의 수출은 금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방곡령은 일본 측의 항의로 번번이 해제되었다.

     이 중 1889년과 1890년에 함경도와 황해도에서 실시한 방곡령은 조선과 일본 사이에 외교 문제로 번지기도 하였다.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은 1개월 전에 외교 담당 관청에 알리고 방곡령을 내리자, 일본은 통고를 받은 날부터 수출 금지 일자까지 1개월이 되지 않는다는 구실로 조선 정부를 압박하여 방곡령을 철회시켰다. 또한 일본은 방곡령으로 자국 상인들이 손해를 보았다고 주장하며 한국에 배상금까지 받아 냈다. 이후 방곡령을 내리는 횟수는 크게 줄었고, 곡물 가격이 크게 올라 곡물 구매층인 도시 빈민이나 농촌 임노동자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상권 수호를 위한 노력

     임오군란 이후 청과 일본 상인이 개항장 이외 지역까지 진출하면서 한성에 상점을 차리고 상권을 확대해 나갔다. 이들은 수입품 외에도 시전 상인이 취급하던 목면이나 명태 등도 판매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개무역을 하던 개항장 객주 등 중간 상인과 한성의 시전 상인이 큰 타격을 입었다.

     외국 상인의 침탈에 대응하고자 객주를 비롯한 상인들은 대동 상회, 장통 상회 등 상회사를 세워 청・일 상인과 경쟁하였다. 이 밖에도 경강상인은 일본의 세곡 운반 독점 시도에 맞서 증기선을 구입하기도 하였고, 개성상인은 수출입 유통에 참여하여 서울 이북 지방에서 상권을 유지하는 데 힘썼다. 

      외국 상인들의 상권 침탈로 조선 상인들의 피해가 커지자, 한성의 시전 상인들도 가게의 문을 닫는 철시 운동을 벌여 외국 상인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황국 중앙 총상회(1898)를 조직하여 상권을 보호하고, 외국 상인의 불법 행위를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 운동은 조선 정부의 무기력한 대응과 청일 양국의 거부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권 수호 운동

     아관 파천 이후 독립 협회는 영강의 이권 침탈에 맞서 만민 공동회를 여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권 수호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러시아의 군사・재정 고문을 퇴출시키고, 한러 은행을 폐쇄하였으며, 절영도 조차 요구를 저지하였다. 또한, 프랑스, 독일의 광산 채굴권 요구도 저지하였으며, 헌의 6조에 이권 양여를 제한하는 규정을 담아 열강의 이권 침탈을 막으려 하였다. 

     러・일 전쟁 직후 일본은 대한 제국에 국가 소유 황무지를 개간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상소 운동이 전개되었고, 보안회가 설립되어 거국적인 반대 투쟁을 전개하였다. 일본은 군경을 동원하여 이를 억압하였지만, 결국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철회하였다. 이 과정에서 황무지 개간을 목적으로 농광회사가 설립되기도 하였다.

 

 

 

 

근대적 기업 육성

   외국 자본의 침탈이 심화되는 가운데 18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상인층과 전, 현직 관료들이 근대적 기업을 세워 열강의 경제 침략에 맞섰다. 대체로 관료 출신 자본가들이 철도, 선박, 은행 등의 분야에서 국내 자본을 기반으로 한 회사 설립을 주도하였다.

     개항 이후에는 일본 상인들이 국내에 들어온 일본 금융 기관의 지원을 받아 상권을 넓혀 갔다. 국내에서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은행을 세워 한국 상인들과 기업을 지원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 결과 최초의 근대적 은행인 조선은행 비롯하여 한성은행, 대한 천일 은행 등이 설립되었다. 이들 은행은 조세금을 취급하거나 상인들에 대한 대출 업무를 담당하였다. 한편 대한 제국도 중앙은행을 세워 열강의 금융 침탈을 막고 화폐 제도 근대화하려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이 밖에도 외국 무역의 확대로 성장한 해운업에서는 대한 협동 우선 회사, 인천 우선 회사와 같이 비교적 큰 규모의 회사가 만들어졌고, 국내 기업인들은 철도 회사를 세우기도 하였다. 

     제조업 분야에서도 민간인들에 의해 근대적 회사가 세워졌다. 한성에서는 종로 직조사, 한성 제직 회사 등이 세워져 근대적 직기로 생산량을 늘려 나갔다. 그러나 정부의 금융 지원이나 관세 장벽 등의 보호 장치가 없어 일본에서 들어오는 면제품과 경쟁하기 어려웠다. 상업과 무역업 분야에서도 마포 미상 회사를 비롯한 여러 회사가 세워졌다. 상업 회사들은 대체로 조선 후기 도고의 연장이었다. 황실이 특정 도고에게 회사 설립을 허가하고, 특정 물품의 독점적인 영업권을 확보하는 대가로 황실 재정 기권인 내장원에 영업세를 바치도록 한 경우가 많았다.

     개항 이후 여러 제약 조건에도 군대적 산업 자본이 성장해가고 있었으나, 외국 자본의 침투와 정부 지원 정책의 부족으로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국채 보상 운동

     일본은 통감부 설치 이후 한국에 식민지 지배를 위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화폐 정리, 정부 부채 정리, 수리 토목 공사 등의 명목으로 막대한 차관을 도입하도록 강요하였다. 차관은 일본이 한국에서 경칠 기구를 확장하거나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위한 시설 등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그 결과 대한 제국은 1년 예산과 비슷한 규모에 해당하는 1,300만 원의 빚을 지게 되었다.

     차관 도입으로 일본에 대한 경제적 예속이 심해지자, 일부 지식인들은 일본에 진 빚을 갚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인식이 확산되어 늘어나는 국채를 갚아 일본의 경제적 예속에서 벗어나 국권을 회복하자는 전 국민적인 모금 운동인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났다. 대구에서 서상돈, 감광제 등을 중심으로 시작된 이 운동은 국채 보상 기성회가 설립되고, 애국 계몽 운동 단체, 대한매일신보 등 언론사가 적극적으로 후원하면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서울에서는 국채 보상 기성회가 조직되고 전국에 약 20여 개의 국채 보상 운동 단체가 만들여졌다. 여기에는 농민, 상인, 학생, 지식인뿐만 아니라 부녀자, 승려,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남자들은 담배를 끊고 음주를 절제하였으며, 여자들은 생활비를 절약하고 비녀와 반지 등을 팔아 성금을 냈다. 일본 유학생과 국외 동포들도 성금을 보내왔고, 고종 황제와 정부 대신들도 금연을 하면서 동참하였다. 그 결과 약 19만 원의 성금을 모았다. 

     그러나 통감부는 이 운동을 일본에 대항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모금 운동에 앞장서던 대한매일신보의 양기탁을 성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하는 등 탄압하였다. 그 결과 국채 보상 운동은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중단되었고, 모금된 돈은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의 기금으로 전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