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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근대 문물의 수용과 생활의 변화

근대 문물의 유입과 생활양식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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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문물의 수용과 생활의 변화

 

근대 문물의 수용

     개항 이후 다양한 근대 문물이 들어왔다. 조선 정부는 부국강병의 일환으로 근대 문물을 도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대한 제국 시기에 식산흥업이 강조되면서 많은 근대 시설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었고, 관련된 인력 양성을 위한 학교가 설립되었다.

     전기와 전차, 전신, 우편, 철도 등 다양한 근대 문물이 수용되면서 사람들의 생활에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또한 사람들의 의식에도 변화가 생겨 지리와 공간 감각이 달라졌으며, 근대적인 시간관념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근대 문물의 수용 과정은 외세의 이권 침탈이나 침략과 연결되기도 하였다.

     개항 이후 의식주에도 큰 변화가 나타났다. 갑오개혁으로 신분제에 따른 일상생활의 규제가 폐지되고, 개항장과 한성을 중심으로 외국 문화가 들어오며 새로운 의복과 건축 양식, 다양한 외국 음식이 들어왔다. 

 

 

 

 

근대 과학 기술의 수용

     개항 이후 외국과의 교섭이 늘어나면서 전신・우편 사업이 도입되었다. 전신 사업은 일본이 나가사키와 부산 사이의 해저 전선을 개통한 것에서 시작하여 중국, 일본과 연결하는 국제 통신망을 갖추었다. 초기에는 청과 일본이 전신 업무를 주도하였으나 조선 정부가 전보사를 설립하면서 전보사가 이를 맡았다. 우정총국을 설립하고 근대적 우편 제도를 실시하려 하였으나 갑신정변 이후 중단되었다. 정부가 우체사를 설립하면서 우편 사업을 다시 시작하였고, 1900년부터는 국제 우편 업무도 실시하였다. 전화는 경운궁에 최초로 설치하였으며 곧 시내 전화 업무를 개시하였다. 

     이 무렵 전기 기술을 도입하면서 경복궁에 최초로 전등을 설치하였다. 이후 한성 전기 회사가 설립되어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전기 사업을 주도하였다. 한성 전기 회사는 1899년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에 전차를 운행하고 가로등을 설치하였다. 

     철도는 열강의 이권 침탈 과정에서 부설되었다. 일본 자본에 의해 경인선(1899)이 개통된 이래 경부선(1905), 경의선(1906)이 개통되었다. 철도 부설 과정에서 많은 토지가 철도 부지로 편입되고 농민들이 공사에 동원되면서 민중의 저항도 있었다. 철도 부설로 유통망이 수운 중심에서 육로 중심으로 변하고, 물품의 빠른 수송과 지역 간 교류가 촉진되었다. 또한 요금만 내면 누구나 기차를 이용할 수 있어 신분 의식을 허무는 데 영향을 주었다. 

 

 

 

 

서양 의료 기술의 도입

     서양인 선교사에 의해 서양 의료 기술이 도입되었다. 1885년 조선 정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이후 제중원으로 개칭) 을 설립하는 한편, 의학당을 세워 의료 인력을 양성하였다. 정부가 제중원 운영을 미국 선교사에게 맡긴 뒤 제중원은 세브란스 병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편, 지석영은 종두법을 배워 실행하였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종두 서적인 ⌜우두신설⌟ 을 저술하였다. 그의 건의로 정부가 관립 의학교와 광제원을 설립하였는데, 광제원은 대한 의원으로 확대・개편되었다.

 

 

 

 

의식주의 변화

     근대 문물의 수용과 함께 의식주 생활에 변화가 나타났고 이러한 변화는 의복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조선 정부는 갑오개혁 이후 관리들의 공사 예복을 두루마기로 통일하고 단발령과 함께 양복을 입어도 좋다는 법령을 공포하였다. 1900년 이후에는 고종의 복장이 서양식으로 바뀌었고, 문무관들도 서양식 예복이나 제복을 착용하기 시작하였다. 여성들의 옷차림에서는 개량 한복이 등장하였고, 외출 때 쓰던 장옷과 쓰개치마가 점차 사라졌다.

     외국인의 왕래가 빈번해짐에 따라 음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피해 있을 때 서양 요리를 접하였고, 환궁한 후에도 서양식 요리와 커피를 즐겼다. 관리들도 외국 외교관들과의 연회에 참석하면서 서양 음식에 점차 익숙해졌다. 이 시기에는 중국의 호떡・찐빵 등이 들어왔고, 일본의 가락국수, 어묵, 초밥 등이 소개되었다.

     주거에서는 신분에 따른 가옥 규모, 건축 자재, 장식 등의 제한이 점차 사라졌다. 서울과 개항장을 중심으로 외국 공사관이나 은행, 병원, 성당, 교회 등이 서양・일본 건축 양식으로 세워졌다. 대표적인 건축물로 러시아 공사관, 영국 공사관, 명동 성당, 정동 교회, 덕수궁의 정관헌・석조전 등이 있다.

 

 

 

 

국외로의 이주 증가

     19세기 중엽부터 한국인들의 중국 이주가 본격화되었고, 1900년경에는 일본, 미주로의 이주도 이루어졌다. 1860년대부터 한국인들은 기근, 빈곤, 수탈 등을 피해 만주로 이주하여 한인 사회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청의 관원과 토착인들의 핍박에서 벗어나고자 대한 제국 정부에 자신들을 보호해 줄 관원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다. 정부는 1902년 이범윤을 간도 시찰원으로 파견하여 이주 동포를 보호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러일 전쟁 이후에는 제대로 된 보호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일제가 한국의 국권을 침탈하여 내정 간섭을 본격화하자 항일 운동가들이 만주 지역으로 넘어가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러시아의 연해주는 국내와 가까워 1860년대부터 한국인이 이주해 살았다. 이주 초반에는 연해주 지역의 관리가 한국인 이주민에게 우호적이었으나 점차 러시아인과 한국인 사이에 경작할 토지를 놓고 경쟁이 일어났다. 1910년 전후 일본의 탄압을 피해 이주해 온 한국인과 해외에 기지를 건설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려는 애국지사들이 다수 망명하면서 연해주에는 한인 집단촌이 형성되었다.

     한국인의 일본 이주는 1910년 이전에는 유학생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그 수도 많지 않았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일본이 호황을 맞으면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일본 이민이 늘어났다.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들은 오사카, 후쿠오카 등 대도시와 규슈, 홋카이도 등 탄광 소재지에 많이 거주하였다.

     미주로의 이주는 1903년 백여 명의 한국인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로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 1905년까지 7천여 명의 노동자가 하와이로 이주하였다. 독신 남성이었던 이들 대부분은 한국인 신부를 구하고자 하였다. 천여 명의 한국인 여성이 사진만 보고 결혼하는 방식으로 하와이로 건너갔는데, 이들을 ‘사진 신부’라고 하였다. 이주한 한국인들은 미국 서부 지역으로 재이주하기도 하였다.

 

 

 

 

문학・예술의 변화

     서양 근대 문물의 수용은 문학과 예술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문학에서는 박은식의 ⌜서사건국지⌟, 장지연의 ⌜애국부인전⌟ 등 역사・전기 소설과 현실을 풍자하는 박은식의 ⌜몽배금태조⌟, 안국선의 ⌜금수회의록⌟ 등의 소설이 출간되었다. 이전과는 다른 문학 형태로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와 같은 신체시가 나왔고 이인직의 ⌜혈의 누⌟, 이해조의 ⌜화의 혈⌟, ⌜자유종⌟ 과 같은 신교육과 계급 타파 등 문명개화를 주제로 한 신소설이 등장하였다.

     음악에서는 서양식 곡에 우리말 가사를 붙인 창가가 유행하였고, 1901년에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군악대가 설치되었다. 을사늑약 이후 통감부가 일본 노래들을 번역하여 학생들에게 가르치자 한국인들은 민요 형식을 빌린 의병 창의가, 용병가 등을 만들기도 하였다. 한편, 한 사람이 부르던 판소리를 여러 사람이 나누어 부르는 창극도 유행하였다. 미술 분야에서는 서양 화풍이 도입되어 유화가 그려졌고, 연극 분야에서는 현대식 극장인 원각사에서 「은세계」 와 같은 작품이 공연되었다.

 

 

 

 

종교계의 변화

     개항 이후 유교계와 불교계에서는 혁신을 주장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박은식은 유교구신론을 통해 유교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한국 불교를 일본 불교에 예속시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나자 한용운은 ⌜조선불교유신론⌟ 을 써서 개혁을 주장하고 박한영 등과 불교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운동을 펼쳤다.

     동학은 간부 이용구 등이 일진회를 만들자 손병희가 이들을 몰아내고 1905년 천도교로 개칭하였다. 천도교는 여러 학교를 설립하고, 기관지 ⌜만세보⌟ 를 발행하였다. 나철, 오기호 등은 단군 신앙을 기반으로 1909년 대종교를 창시하고 만주 지역으로 포교를 확대하였다.

     한편, 천주교는 프랑스와의 수교로 포교의 자유를 인정받은 이후 소학교, 고아원, 양로원 등을 세웠으며, 경향신문을 발행하였다. 개신교는 미국과의 수교 이후 선교의 일환으로 병원을 세워 환자 치료와 의사 양성에 힘썼다. 또한 이화 학당, 숭실 학교 등을 설립하여 교육에 힘쓰고, 여성 교육과 사회 봉사 활동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