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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근대 의식의 확대

국민 의식과 민권 의식의 확산 

개항 이후 외국 공사관이 설립되고 세계 각국과의 교섭이 늘면서 외국어 학습의 필요성이 높아졌다. 1908년 지석영 등은 조선 후기의 정약용이 만든 아동용 한자 학습서인 ⌜아학편⌟에 영어 단어의 철자를 적고 한글로 발음을 표기한 책을 간행하였다. 이 책에서는 영어 외에 일본어, 중국어도 함께 덧붙여 3개국의 단어를 익힐 수 있도록 하였다. 

 

썸네일 근대 의식의 확대
근대 의식의 확대

 

평등 의식 확산

     조선 후기에 사회가 변화하면서 양반 중심 신분제를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나타났다. 이는 갑신정변 당시 인민 평등권을 확립하자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동학 농민 운동에서도 노비 문서 소각, 과부 재가 허용 등을 주장하여 평등 사회로의 이행을 촉구하였다.

     갑오개혁에서는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여 신분제를 폐지하여 근대 사회로의 길을 열었다. 이와 함께 신분에 따른 일상생활의 규제와 연좌제, 조혼을 폐지하였으며, 과부의 재가가 허용되는 등 평등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다양한 조치가 이루어졌다. 이로 인하여 서얼, 중인, 천민 출신이 고위 관료가 되기도 하였다. 재판 제도가 개혁되면서 법관이 아니면 죄인을 체포하고 심문하지 못한다는 인식도 확대되었다. 특히 독립 협회가 전개한 민권 운동의 영향으로 백성이 정부 고관을 고소・고발하는 사례가 늘어나는 등 민권 의식이 높아졌다.

     신분제 폐지 이후 독립 협회는 천부 인권 사상을 바탕으로 언론과 집회의 자유, 신체의 자유 등 개인의 권리 보장과 남녀 차별 폐지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토론회와 연설회 등을 열어 평등 의식을 확산하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세워진 학교와 여러 단체도 평등 의식을 확산하는 데 기여하였다.

 

 

 

 

여성 의식 성장

     개항 이후 여성의 인식도 변화하였다. 가부장제 아래서 차별받던 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질 것을 주장하였다. 1898년 한성에서 여성들이 여성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여권 통문⌟을 발표하였고 여학교 설립을 주장하였다. 이어 최초의 근대적 여성 단체인 찬양회가 조직되었고, 1905년부터는 여성들이 여자 교육회, 진명 부인회 등의 단체와 양규 의숙, 진명 여학교 등의 설립을 후원하였다. 외국 유학을 다녀온 여성이나 개신교 여성들은 교사, 개신교 전도사 등으로 활동하였다. 박에스더는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되었고, 윤희순은 의병에 참여한 시아버지를 도와 의병 투쟁을 지원하였다. 이러한 여성들의 사회 참여 움직임은 국채 보상 운동에서도 나타났다. 

 

 

 

 

근대적 교육 기관의 설립

     개항 이후 부국강병을 위해 서양식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확산하면서 근대 학교가 세워졌다. 정부는 1880년대 원산 학사를 비롯하여 영어 교육 기관인 동문학, 서양의 학문을 교육하는 육영 공원 등 신식 학교가 설립되어 현직 관리와 양반 자제들을 가르쳤다. 함경도 덕원에서는 개화파 관료와 주민들이 원산 학사를 세워 외국어와 법률, 만국 공법, 지리 등의 근대 학문을 가르쳤다. 외국인 선교사도 배재 학당, 이화 학당 등을 세웠다. 이들 학교에서 학생들은 근대 학문과 함께 인권, 민권 등 근대 의식을 익혔고, 졸업 이후에는 정부의 근대화 정책과 독립 협회 활동에 참여하는 등 근대 국가 건설 운동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갑오개혁 이후 정부가 과거제를 폐지하고 교육입국 조서를 반포하면서 소학교, 한성 중학교, 한성 사범 학교 및 외국어 학교 등이 설립되었다. 이들 학교에서는 대체로 수신(도덕), 국문, 역사, 지리, 산수 등을 기본 교과목으로 가르치고 학교의 성격에 따라 전문 교과목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또한 전문직 양성을 위해 정부는 법관 양성소, 무관 학교, 상공 학교 등을 세웠다. 전・현직 관료들도 홍화 학교, 광흥 학교, 법률 학교 등의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였다.

     러・일 전쟁과 을사늑약 체결 이후 애국 계몽 운동과 항일 의병 운동으로 한국인의 민족의식이 강화되었다. 이 시기에는 양정의숙, 보성 학교, 오산 학교, 대성 학교 등 많은 사립학교가 세워져 한국어와 한국사 교육을 중심으로 작문, 음악, 체육 등 민족과 애국심을 강조하는 교육을 하였다. 그러자 통감부는 정부에 1908년 사립학교령을 공포하게 하여 사립학교 설립을 제한하였다. 통감부는 일본인 교사를 배치하여 일본어를 보급하려 하였고, 교과서 검정 제도를 도입하여 민족주의적 성격을 지닌 교과서를 배제하고자 하였다.

 

 

 

 

언론 기관의 발달

     신문은 근대적 민권 의식과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였다. 개항 이후 국내외 정세와 정부의 개화 정책 등을 소개할 목적으로 1883년 박문국에서 순 한문체로 한성순보를 발행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는 갑신정변으로 발행이 중단되었다가 한성주보로 다시 발간되었다. 두 신문은 국제 정세와 서구 제도, 문물, 역사 등을 소개하였다.

     1896년에는 서재필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최초의 민간 발행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독립신문은 독립신문은 대중 계몽을 위한 다양한 기사와 논설을 게재하였다. 고위 관료의 부정부패를 폭로하고 국민의 권리와 의무, 국제 정세, 열강의 이권 침탈 상황 등을 전하였다. 순 한글을 사용하여 독자를 늘렸으며 한글이 일상적인 문자로 자리 잡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신문은 영문판으로도 발행되어 국내 사정을 외국인에게 알렸다. 1898년에 창간된 제국신문은 하층민과 부녀자를 주된 독자층으로 삼아 순 한글로 간행하였고, 법률 지식과 풍성 개량으로 국민을 계몽하고자 하였다. 황성신문은 국한문 혼용체로 발행되었으며, 지식인을 대상으로 외국의 독립과 망국의 역사, 고대사 기사를 다루어 민족의식을 높이려 하였다. 양기탁이 중심이 된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에 창간하였다. 영국인 베델을 발행인으로 내세워 일제의 국권 침탈과 친일 정권의 부패무능을 비판하고 항일 의병 활동을 호의적으로 보도하고, 국채 보상 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데 앞장섰다. 순 한글, 국한문, 영문 세 종류로 발행하였다. 이들 신문은 대중을 계몽하고 애국심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통감부는 정부에 1907년 신문지법을 공포하게 하여 한국인이 발행하는 신문을 탄압하였으나 많은 신문사가 일제의 국권 침탈을 비판하는 언론 활동을 펼쳤다. 

 

개항이후 발행된 다양한 신문 사진
출처: 동아출판 고등학교 한국사

 

 

 

 

국학의 발달

     열강의 침략이 거세지자 국어와 한국사 연구를 통해 민족 정신을 일깨우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국문 사용이 점차 늘면서 문자 체계와 철자법 등을 통일할 필요성이 높아졌다. 이에 정부는 국문 연구소를 세워 우리말과 글을 연구・정리하였다. 유길준은 ⌜대한문전⌟, 주시경은 ⌜국어문법⌟ 등을 간행하여 한국어 사용법을 통일하여 나갔다.

     갑오개혁 이후 우리 역사를 새롭게 인식하려는 노력으로 근대적인 역사서도 많이 출판되었다. 정부는 애국심과 자주독립 의식을 확산하기 위해 ⌜조선 역사⌟와 같은 교과서를 편찬하였다. 을사늑약 이후 박은식은 고구려를 높이 평가하는 ⌜동명왕실기⌟, ⌜천개소문전⌟ 등을 남겼다. 하지만 일부는 일본에서 제국주의적 침략 목적으로 진행된 한국사 연구를 그대로 받아들인 경우도 있었다. 신채호와 박은식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특히 신채호는 역사가 애국심의 원천이라 하면서 ⌜수군 제일 위인 이순신전⌟, ⌜을지문덕전⌟등을 지었고, ⌜독사신론⌟을 발표하여 민족을 중심으로 한 우리 역사의 체계화를 모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