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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제1차 세계 대전과 러시아 혁명

제1차 세계 대전과 러시아 혁명 

제1차 세계 대전은 인류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대규모의 전쟁이었다. 전쟁에 참여한 국가들은 가능한 인력과 물자를 모두 동원하여 총력전을 전개하였다. 또한 이들 국가들은 발달된 과학 기술을 적용한 탱크, 전투기, 기관총, 수류탄, 잠수함, 독가스 등 새로운 무기를 전쟁에 투입하면서 엄청난 인적・물적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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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과 러시아 혁명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며 유럽 제국주의 국가 사이에 식민지 쟁탈전이 치열해졌다. 이들 제국주의 국가는 이해관계에 따라 동맹을 맺었는데, 독일은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와 3국 동맹(1882)을 맺고 대외팽창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에 맞서 프랑스와 영국이 러시아와 함께 3국 협상(1907)을 맺으면서 긴장감이 커졌다. 

     20세기 초에는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발칸반도의 여러 나라가 독립하였다. 이 중 세르비아는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우며 세력 확장을 시도하다가, 이 지역으로 진출하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갈등을 빚었다.

     이런 상황에서 1914년 6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를 방문하던 중 세르비아 청년에게 암살당하였다(사라예보 사건). 사건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굴욕적인 조약 체결을 요구하였고, 세르비아가 이를 거부하자 선전 포고를 하면서 전쟁이 일어났고, 3국 동맹과 3국 협상 측이 전쟁에 가담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전개

     전쟁이 일어나자 제국주의 열강은 이해관계에 따라 둘로 나뉘었다. 3국 동맹국인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지원하였다.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지원하자 3국 협상국인 영국, 프랑스도 전쟁에 가담하여 연합국을 이루었다. 일본은 영・일 동맹에 따라 연합국에 가담하였고, 중국도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서부 전선에서는 독일의 공격에 프랑스가 맞서면서 전쟁이 한동안 교착 상태에 빠졌다. 동부 전선에서는 독일군이 빠르게 러시아로 진격하였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수립된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는 이듬해 독일과 단독 강화를 맺고 전쟁에서 이탈하였다.

     한편,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영・일 동맹을 구실로 내세워 독일에 선전 포고하고 협상국 측에 참전하였다. 일본은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중국의 산둥반도와 남태평양의 여러 섬을 공격하여 획득하였고, 중국에 '21개조 요구'를 제출하여 중국에서의 권익을 확대하려고 하였다. 

     이후 독일은 서부 전선에서 총공세를 펼쳤으나 실패하였고,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계기로 미국이 연합국에 가담하면서 전세는 연합국 측으로 기울었다. 동맹국 측 국가가 차례로 항복하면서 전쟁에서 불리해졌고, 독일에서 혁명이 일어나 새로 수립된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가 협상국 측과 휴전 조약을 체결, 항복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은 끝이 났다(1918). 

 

 

 

 

베르사유 체제의 성립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승전국은 전후 처리를 위해 파리 강화 회의를 열었다. 한편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14개조 평화 원칙을 전후 처리의 원칙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승전국은 패전국을 철저히 응징할 것을 주장하며 패전국과 개별적으로 조약을 맺고, 독일과는 1919년 6월에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하였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은 모든 해외 식민지를 잃고 승전국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베르사유 조약을 바탕으로 유럽에는 새로운 국제 질서인 베르사유 체제가 형성되었다. 

     14개조 평화 원칙에 따라 국제기구의 창설도 본격화하였다. 파리 강화 회의에서 집단 안전 보장, 국제 분쟁 중재, 무기 감축 등을 원칙으로 하는 규약을 정하였고, 1920년에 국제 연맹이 창설되었다. 그런데 미국은 국제 연맹에 불참하였고, 초기에는 독일과 소련의 가입이 허용되지 않았다. 또한, 침략 행위를 제재할 군사적 권한이 없는 한계가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 승전국과 패전국을 막론하고 유럽 각국의 세력이 약화된 반면, 미국과 일본은 경제적 이득을 얻어 국력이 크게 성장하고 국제 사회에서 영향력이 커졌다. 

 

 

 

 

러시아 혁명

     19세기 후반 러시아에서는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노동자 계급이 성장하였고, 지식인 사이에 사회주의가 널리 펴졌다. 하지만 차르의 전제 정치는 계속되었고, 봉건적 압제로 민중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1905년 1월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생존권 보장과 입헌 정치를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러시아 정부가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면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피의 일요일 사건), 이를 계기로 러시아 각지에서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났다. 결국 차르는 의회의 입법권 보장 등 개혁을 약속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러시아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였으나, 전쟁에서 잇따라 패배하며 국민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에 1917년 3월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가 중심이 되어 식량 배급, 전쟁 중지, 전제 정치 타도 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어 노동자와 병사들은 소비에트를 결성하여 차르 니콜라이 2세를 몰아내고 제정을 무너뜨렸다. 그 결과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3월 혁명, 러시아력 2월).

     그러나 임시 정부는 개혁을 뒤로 미룬 채 전쟁을 계속하였다. 이에 1917년 11월에 레닌을 중심으로 하는 볼셰비키가 무장봉기를 일으켜 임시 정부를 무너뜨리고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하였다(11월 혁명, 러시아력 10월).

     혁명 이후 레닌은 독일 등 동맹국과 강화를 맺고 전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각국의 사회주의자를 연결하는 코민테른을 수립하고 토지 개혁과 공장・철도의 국유화 등 사회주의적 개혁을 추진하였다. 또한, 소비에트 러시아를 중심으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 주변의 소비에트를 흡수하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을 수립하였다(1922). 

     레닌은 국제 공산당 조직인 코민테른을 조직하고, 제국주의에 반대하여 일어난 각국의 노동 운동과 식민지 해방 운동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는 사회주의가 전 세계로 확산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중국의 변화

     제1차 세계 대전에 연합국으로 참전한 중국은 일본이 차지한 산둥반도 이권 반환과 '21개조 요구' 폐지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영국, 프랑스 등 승전국은 일본의 이권과 21개조 요구를 인정하였다. 이에 중국인들은 산둥반도 이권 반환, 21개조 요구 철폐 등을 요구하며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5・4 운동, 1919).

     5・4 운동 이후 중국에서는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이 창당되었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군벌의 난립으로 분열되어 있더 중국을 통일하고자 제1차 국・공 합작을 이루었다. 하지만 공산당의 세력이 급속히 확산되면서 국・공 대립은 심화되었고, 쑨원의 뒤를 이은 장제스가 북벌 과정에서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국・공 합작은 결렬되었다. 이후 장제스는 베이징의 군벌 정부를 타도하고, 난징에 국민 정부를 수립하였다(1927).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의 변화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전쟁 물자를 팔아 경제 호황을 누렸으나, 전쟁이 끝나자 점차 불황에 빠져들었다. 불황으로 생활이 어려워진 노동자들은 활발히 노동 운동을 전개하였다. 사회주의도 확산되어 일본 공산당 등 사회주의 단체가 결성되었다. 이제 일제는 1925년에 치안 유지법을 제정하여 일본 국내는 물론 식민지인 한국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하였다.

     한편 일본은 승전국의 자격으로 국제 연맹 상임 이사국이 되는 등 국제적인 위상을 높였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세력이 커지자 열강은 일본의 팽창 저지와 중국을 둘러싼 이해관계 조정, 해군 군비 축소를 위해 워싱턴 회의를 열었다. 그 결과 일본은 산둥반도의 이권을 중국에 반환하였으며, 해군력도 축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