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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3・1 운동 이전의 민족 운동

3・1 운동 이전의 민족 운동 

1907년 헤이그 특사로 만국 평화 회의에 참석한 이상설은 1906년 만주에 서전서숙이라는 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에서는 역사, 지리, 국제 공법 등의 교육과 항일 민족 교육을 하였다. 특히 이상설은 교사의 급여, 교재비 등을 자신의 재산으로 충당하면서 학교를 운영하였다. 국권 피탈 이후 민족 운동가들은 국외에서 서전서숙과 같은 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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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이전의 민족 운동

 

국내 항일 비밀 결사의 활동

     대한 제국은 국권을 빼앗긴 뒤 국내의 민족 운동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국내 의병 활동이 위축되었고,  안악 사건과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가 해체되는 등 국내의 민족 운동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처럼 일제가 국내 독립운동의 탄압을 강화하자, 많은 애국지사와 의병 부대가 만주와 연해주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국내에서는 마지막 의병장이라 불린 채응언은 한반도 서북 지방에서 1915년까지 의병 활동을 벌이며 일제에 타격을 주었다. 또한 국내에 남은 민족 지도자들은 비밀 결사의 형태로 독립운동을 이어 나갔다. 이들은 주로 군자금을 모집하거나 친일파를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국내의 항일 비밀 결사 중에는 독립 의군부와 대한 광복회가 활발히 활동하였다. 의병장 출신의 임병찬은 고종의 비밀 지시를 받고 각지의 유생을 모아 독립 의군부를 조직하였다(1912). 독립 의군부는 나라를 되찾은 뒤고종을 복위시킨다는 복벽주의의 입장에서 전국적인 의병 전쟁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조선 총독과 일본 총리에게 국권 반환 요구서를 발송하려다가 조직이 발각되어 해체되었다. 대구에서는 채기중, 박상진 등을 중심으로 대한 광복회가 결성되었다(1915). 대한 광복회는 국권 회복 이후 공화정 형태의 근대 국가를 건설하려 하였으며, 독립 전쟁을 목표로 군대식 조직을 갖추고, 군관 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유한 친일파를 처단하고, 광산, 우편차 등을 습격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일제에 조직이 발각되어 해체되었다.

     이 밖에 평양 숭의 여학교의 교사들과 학생들은 송죽회를 결성하여 망명한 독립 운동가의 가족을 돕고, 자금을 모아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 대성 학교 출신 학생들도 비밀 결사인 기성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국내 비밀 결사 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차츰 힘을 잃었으며, 이후 애국지사들은 민족의 힘을 기르기 위한 교육 활동에 힘썼다.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기지

    만주 지역에서도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 시기 만주의 독립운동은 학교 설립, 독립군 양성 등 독립운동 기지 건설 활동이 주를 이루었다.      

     북간도는 19세기 후반부터 몰락한 한국 농민들이 삶의 터전을 찾아 이주한 지역으로, 독립운동 기지를 세우는 데 유리하였다. 이주한 동포들은 용정촌, 명동촌 등 한인 집단촌을 형성하였는데, 독립운동가들은 간민회를 만들어 동포 사회를 이끌었으며, 이상설, 김약연 등은 서전서숙과 명동학교 등을 세워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한편 교단을 북간도로 옮긴 대종교는 중광단을 만들고 독립군을 양성하였으며, 3・1 운동 이후에는 중광단을 북로 군정서로 확대・개편하여 활동하였고 사관 연성소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서간도 지역에서는 국권 피탈을 전후하여 이주한 신민회 회원들이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류허현 삼원보에 자치 기관인 경학사를 설립하고, 신흥 강습소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항일 운동 단체인 경학사는 이후 부민단, 한족회로 발전하면서 서로 군정서를 조직하였다. 신흥 강습소는 군사 교육을 실시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고, 이후 신흥 무관 학교로 발전하였다.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 기지

     연해주 지역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국내와 가까워서 19세기말부터 많은 한국인이 이주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한인 집단 거주지인 신한촌이 건설되었고(1911), 자치 단체인 권업회가 조직되어 한국인 인권 신장 활동을 하였다. 권업회는 권업신문을 발간하였으며, 독립운동을 수행하기 위해 1914년에 이상설과 이동휘를 정・부통령으로 하는 대한 광복군 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일제와 관계가 악화될 것을 꺼린 러시아 정부가 한국인의 정치・사회활동을 금지하면서 본격적 활동은 어려웠다.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이동휘 등이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 사회당을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연해주 내 한인 단체를 망라한 전로 한족회 중앙총회가 결성되었다.

 

 

 

 

미주 지역의 독립운동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한국인의 집단 이주가 이루어지면서 미주 지역에 한인 동포 사회가 형성되었다. 1908년에 장인환과 전명운이 미국인 스티븐스를 저격한 사건을 계기로 미주 지역 한인들의 민족 운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여러 한인 단체를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 결과 대한인 국민회가 결성되었다.

     대한인 국민회는 미국 본토, 하와이, 멕시코 등지에 지부를 설치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만주와 연해주 지역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또한 신한민보를 발행하여 항일 의식을 고취하였고, 교민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이 밖에도 박용만은 하와이에서 1914년에 대조선 국민 군단이 결성하여 청장년을 대상으로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고, 멕시코 이주민들은 승무 학교를 세워 무장 투쟁을 준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