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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독립 공채를 발행하였다. 중국에서 발행한 독립 공채의 금액은 1,000원 500원 100원의 세 가지였으며, 우리나라가 독립한 이후에 원금을 상환하기로 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특별법을 만들어 2013년까지 신고된 총 27건의 독립 공채를 상환하였다. 

 

썸네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수립

     3・1 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을 효율적이고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국내외에서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연해주에서는 전로 한족회 중앙 총회를 열어 이를 대한 국민 의회로 개편하였고, 국내에서는 13도 대표가 모여 한성 정부를 세웠다. 중국 상하이에서도 독립운동가들이 임시 의정원을 만들어 임시 정부를 구성하였다.

     여러 임시 정부는 곧바로 통합을 논의하였다. 그 결과 한성 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대한 국민 의회를 통합하기로 하였다. 이 과정에서 임시 정부를 무장 독립 투쟁을 지도하는 데 유리한 연해주에 두어야 한다는 주장과 외교 활동에 유리한 상하이에 두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기도 하였다.

     여러 차례 논의를 거친 후 정부 이름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결정하였으며 위치는 상하이에 두기로 하였다. 그해 9월에 임시 의정원이 대한민국 임시 헌법을 공포하였고, 11월에는 이승만을 임시 대통령,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선출하였다. 임시 정부에는 민족주의 계열뿐만 아니라 한인 사회당 등 사회주의 계열도 일부 참여하였고, 실력 양성론, 외교 독립론 등 서로 다른 이념과 노선의 독립운동 세력이 함께 참여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활동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우리 역사 최초의 민주 공화제 정부로, 삼권 분립의 원칙에 따라 입법 기관인 임시 의정원, 사법 기관인 법원, 행정 기관인 국무원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국내 독립운동을 지도하고 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연통제교통국을 두었다. 

     연통제는 국내의 도・군・면에 설치한 비밀 행정 조직으로 정부 문서와 명령 전달, 독립운동 자금 조달, 정보 보고 등을 맡았다. 교통국은 통신 기관으로 정보 수집・분석과 연락을 담당하였다. 국내외에서 독립 공채를 발행하거나 의연금을 거두어 모인 자금은 연통제와 교통국을 거쳐 전달되었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임시 사료 편찬회를 두어 한・일 관계 사료집을 간행하여 국제 연맹에 제출하였고, 기관지인 독립신문을 발행하여 독립운동 소식을 전하였다. 

 

독립 공채 사진
출처: 동아출판 고등학교 한국사

 

 

 

 

     초기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국제 사회로부터 임시 정부를 승인받고 독립에 대한 지원을 이끌어 내기 위해 외교 활동에 주력하였다.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규식을 외무 총장으로 임명하여 파리 강화 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제출하도록 하였다. 또한, 미국에 구미 위원부를 설치하여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국의 독립 문제를 국제 여론화 하는 외교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1921년에 워싱턴 회의에 독립 요구서를 제출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양한 외교 활동의 결과 임시 정부는 중국 정부의 승인을 받았으며, 1922년에는 이동휘, 김규식 등이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 인민 대표 회의에 참여하여 소련의 레닌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받기도 하였다.

     군사 활동으로는 국무원 산하에 군무부를 설치하여 군사 업무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1920년에는 군무부 직할 광복군 사령부와 광복군 총영 등을 설치하여 무장 투쟁을 하였으며, 이후 육군 주만 참의부를 편성하여 군사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미국에는 한인 비행사 양성소를 설치하였다.

 

 

 

 

국민 대표 회의와 임시 정부의 변화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연통제와 교통국이 발각되어 활동이 어려워지면서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또한, 초기의 주요 정책이었던 외교 독립론이 강대국의 무관심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이승만 계열의 외교 독립론, 이동휘 계열의 무장 투쟁론, 안창호의 실력 양성론 등 독립운동 방법론을 둘러싸고 지도자 사이에 대립이 심해졌으며,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계열 간의 갈등도 나타났다. 

     이러한 가운데 신채호, 박용만 등의 무장 투쟁론자들은 이승만이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위임 통치 청원서를 제출한 사실을 문제 삼아 임시 정부의 개편을 요구하였다. 이어 여러 민족 운동가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 위한 국민 대표 회의가 1923년 상하이에서 열렸다. 그러니 국민대표 회의는 임시 정부의 조직만 바꾸자는 개조파와 임시 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자는 창조파가 대립하면서 결렬되고 말았다.

     국민 대표 회의 이후 많은 민족 운동가가 임시 정부를 떠나면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침체에 빠졌다. 이승만 대통령 탄핵 이후 박은식 대통령을 거쳐 1925년에는 헌법을 고쳐 대통령제를 국무령 중심의 집단 지도 체제로 전환하였지만, 인력과 자금 부족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이에 이동녕과 김구를 중심으로 체제를 정비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