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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무장 독립 투쟁과 의열 투쟁

무장 독립 투쟁의 전개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 용사야 /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 삼천리 이 천만의 우리 동포를 / 건질 이 너와 나로다 ...... 독립문의 자유 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가세" 이 노래는 1910년대부터 독립군이 불렀던 군가로, 나라를 되찾겠다는 의지가 드러나 있다. 만주 일대의 독립군은 계속된 탄압에도 독립 전쟁을 전개하며 일제에 맞섰다.

 

썸네일 무장 독립 투쟁과 의열 투쟁
무장 독립 투쟁과 의열 투쟁

 

국내 무장 독립 투쟁 전개

     3・1 운동 이후 국내에서 여러 독립군 부대가 결성되어 활동하였다. 평안북도 의주의 천마산에서는 최시흥 등이 천마산대를 조직하여 일제 식민 통치 기관을 파괴하고 친일파를 숙청하였다. 동암산에서는 보합단이 조직되어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군자금을 전달하였으며, 친일파를 처단하고 일제 관리와 경찰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한편 황해도 일대에서는 구월산대가 조직되어 은율 군수를 처형하고 밀정을 처단하였다.

 

 

 

 

봉오동 전투

    3・1 운동 이후 만주와 연해주를 중심으로 항일 무장 투쟁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각 지역의 독립군들은 무장 독립 전쟁의 중요성을 깨닫고 국내 진격을 목적으로 한 독립 전쟁을 시작하였다. 서간도 지역에서는 신흥 무관 학교 출신이 중심이 된 서로 군정서, 대한 독립단, 광한단 등이, 북간도 지역에서는 국민회군과 대한 독립군, 대종교가 중심이 된 북로 군정서 등이 조직되었다.

     독립군은 국내에 진입하여 일제와 전투를 벌이고 식민 통치 기관을 파괴하였으며, 군자금 모금, 친일파 처단 등의 활동을 펼쳤다.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은 함경남도까지 진출하여 일제에 피해를 입혔다.

     독립군이 국내 진공 작전을 벌이자 일제는 병력을 동원하여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공격하였다. 이때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군, 안무의 국민회군 등은 연합 부대를 편성하여 공격에 대비하였다. 1920년 6월, 독립군 연합 부대는 봉오동 주변에 매복하고 있다가 추격해 오는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봉오동 전투).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전투지역
출처: 동아출판 고등학교 한국사

 

 

 

 

청산리 대첩

     봉오동 전투에서 패한 일제는 만주 지역 독립군을 전멸하려 하였다. 일제는 일본군이 만주에 진출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 중국 마적들을 매수하여 이들에게 훈춘 영사관을 습격하도록 하였다(훈춘 사건). 일제는 이 사건을 독립군이 일으켰다고 주장하며 이를 구실로 만주 지역에 대군을 동원하여 독립군을 공격하였다. 

     북간도 지역에 있던 북로 군정서, 대한 독립군, 국민회군 등은 일본군의 계획을 미리 알고 근거지를 떠나 허룽현과 안투현 일대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김좌진과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 연합 부대는 추격해 온 일본군을 청산리 일대로 유인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청산리 대첩). 그 결과 많은 일본군을 사살하였으며, 독립 전쟁사에서 가장 큰 승리로 기록되었다. 이 승리로 독립군은 일제의 공격을 저지하였으며, 한국인에게 독립에 대한 자신감을 키워 주었다.

 

 

 

 

독립군의 시련

     일제는 독립군 근거지를 없애고 봉오동 전투 등의 패배를 보복하려 하였다. 이에 1920년 10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간도 지역의 한인 마을을 습격하여 가옥과 학교 등을 불사르고, 한국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간도 참변). 이 사건으로 어린아이와 부녀자를 비롯한 민간인이 무참히 학살당하였다.

     이후 간도 지역의 독립군은 일본군의 계속되는 공세를 피하고, 일본군에 장기 항전을 펼치기 위해 소련과 만주의 국경 지대인 밀산부에 집결하여 서일을 총재로 대한 독립 군단을 조직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약소민족의 민족 운동을 지원하겠다는 러시아의 약속을 기대하고 러시아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내전으로 혼란한 가운데 일부는 다시 만주로 돌아왔고, 일부는 헤이룽강 연안에 있는 러시아령 자유시로 이동하였다. 또한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 유격 부대도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자유시에 모인 독립군 부대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내부 주도권 다툼이 일어났고, 러시아 적군이 독립군의 무장 해제 요구에 따른 발포 등으로 수백 명의 독립군이 희생되었다(자유시 참변, 1921). 이 사건으로 독립군은 러시아 적군에 편입되거나 포로가 되었으며, 일부만이 만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독립군의 재정비

     간도 참변과 자유시 참변으로 큰 타격을 입은 만주의 독립운동 세력은 흩어진 조직을 정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만주 지역의 독립군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3부를 조직하였다. 압록강 연안 지역에 동포 사회를 관할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소속의 군정부인 참의부가 설립되었고, 하얼빈 남쪽 아래 위치한 남만주 일대에는 정의부가 결성되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돌아온 독립군이 중심이 되어 간도와 북만주 일대에는 신민부가 조직되었다. 이들 3부는 만주 지역의 한인 사회에서 동포들의 권리와 이익을 지키면서 독립 전쟁을 수행하였고, 동포 사회를 이끌어 가는 민정 조직과 독립군의 훈련 및 작전을 담당하는 군정 조직을 갖춘 공화주의 자치 정부의 성격을 지녔다. 또한 행정・입법・사법 조직을 구성하고 동포들이 내는 세금으로 조직과 군대를 운영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미쓰야 협정을 체결하여 만주 지역 독립군을 위협하였다.

     한편 1920년대 후반에는 민족 유일당 운동의 영향으로 3부 통합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결과 남만주에는 국민부가, 북만주에는 혁신 의회가 조직되었다. 이후 국민부는 조선 혁명당으로, 혁신 의회는 한국 독립당으로 개편하였다. 

 

 

 

 

민족 유일당 운동과 3부 통합

     독립군의 정비에 위협을 느낀 일제는 1925년 만주 군별과 미쓰야 협정을 맺어 독립군을 찾아내려 하였다. 일본군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으로 동포들의 지원까지 줄어들면서 독립군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제1차 국공 합작을 이루었는데, 이는 국민대표 회의의 결렬 이후 침체에 빠져 있던 중국 관내의 독립운동 세력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러던 중 1920년대 후반 중국 관내와 만주에서는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의 통합을 이루려는 민족 유일당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결과 중국 베이징에서 한국 독립 유일당 북경 촉성회가 조직되었다.

     만주에서도 3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통합을 둘러싼 갈등으로 완전한 통합을 이루지는 못하고, 3부는 국민부와 혁신 의회로 각각 재편되었다. 남만주의 국민부는 조선 혁명당과 조선 혁명군을 결성하여 항일 무장 투쟁을 계속하였다. 북만주에서는 혁신 의회가 해체된 이후 지청천 등이 한국 독립당을 결성하였고, 만주 사변 이후 한국 독립군을 조직하여 일제에 맞섰다. 

 

 

 

 

의열단 결성

      3・1 운동 이후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더욱 강력한 무장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많은 독립군 부대가 조직되었고, 일제 요인과 친일파 처단, 식민 통치 기관의 파괴를 목적으로 의열 단체게 결성되었다. 

     1919년 11월에 만주 지린성에서 김원봉, 윤세주 등이 중심이 되어 의열단을 결성하였다. 의열단은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비밀 조직으로 운영되었으며, 베이징, 난징 등지로 옮겨 다녔다. 또한, 무정부주의적인 경향을 보였고, 조선 총독, 친일파 등을 암살하는 등 일제 요인 처단과 조선 총독부, 동양 척식 주식회사 등의 식민 통치 기관 파괴 등에 주력하였다. 김원봉의 요청으로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 혁명 선언⌟에는 폭력 투쟁을 통한 민중의 직접 혁명을 추구하는 의열단의 기본 정신이 나타나있다. 김익상, 김상옥 등의열단원들은 이 선언을 활동 지침으로 삼았고, 이들의 의거 활동은 동포들에게 항일 의식과 독립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었다. 

     1920년대 후반에 들어 의열단은 의열 활동만으로는 독립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조직적인 항일 무장 투쟁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원들은 중국의 황푸 군관 학교에 입학하여 정규 군사 훈련을 받았고, 1930년대에는 독립운동 지도자 양성을 위해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 혁명 간부 학교를 설립하였다. 또한, 중국 관내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한 민족 혁명당 설립(1935)을 주도하였다.

 

 

 

     

한인 애국단의 의열 활동

     의열단이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을 무렵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연통제와 교통국이 일제에 발각되어 와해되었고, 국민 대표 회의의 결렬, 이승만 대통령 탄핵, 조직 개편이 이어지면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게다가 만주 사변으로 독립군의 사기가 떨어지고, 만보산 사건 등으로 한국인에 대한 중국인의 감정이 악화되었다. 이에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침체를 극복하고,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1931년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였다.

     한인 애국단의 이봉창은 1932년 1월 도쿄에서 일왕이 탄 마차에 폭탄을 던졌다. 이 의거는 비록 실패하였지만 일제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일제는 이 사건을 다룬 중국 신문의 내용을 빌미로 상하이를 기습 공격하여 점령하였다(상하이 사변). 

     일제는 상하이 사변 승리 이후 훙커우 공원에서 일왕의 생일 및 상하이 점령 기념 축하식을 열었다. 이때 한인 애국단의 윤봉길이 단상에 폭탄을 던져 많은 일본군 장성과 고관을 살상하였다(1932. 4.) 이 의거는 국내외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특히 중국인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이를 계기로 중국 국민당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인정하고 지원을 강화하였다. 하지만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심하게 받게 되어 상하이를 떠나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