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
이화 학당에서 공부하던 유관순은 1919년 3월 서울에서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모든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지자, 유관순은 고향인 병천(현재의 천안시)으로 내려가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벌였다. 헌병에게 체포된 유관순은 일제의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저항하다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독립 선언의 움직임
제1차 세계 대전이 전개되던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러시아 혁명을 주도한 레닌은 식민 지배를 받는 민족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하였다.
한편 1918년 1월에 미국 대통령 윌슨은 14개조 평화 원칙을 발표하였다. 14개조 평화 원칙에는 각 민족은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 정치적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민족 자결주의의 원칙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국제 사회의 움직임에 세계 여러 약소민족은 독립의 희망을 품게 되었다. 국내외 민족 운동가들은 이러한 국제 사회의 변화를 기회로 삼아 독립 투쟁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한국인들도 국제 사회의 움직임에 발맞추어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상하이의 신한청년당은 1919년 1월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로 파견하여 독립 의지를 알리려 하였고, 연해주의 민족 지도자들도 파리에 대표단을 파견하였다.
독립 선언의 움직임도 활발하였다. 상하이에서는 신규식, 신채호 등이 '대동단결 선언'을 발표하였으며, 만주에서는 조소앙 등이 독립 선언을 준비하였다. 일본에서도 1919년 2월 8일, 유학생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 청년 독립단이 도쿄의 기독교 청년 회관에서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였다(2・8 독립 선언).
3・1 독립 선언과 만세 시위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 국내에서도 독립 선언의 움직임이 일었다. 1919년 1월에 고종이 갑자기 승하하면서 일제가 고종을 독살하였다는 소문이 퍼져 반일 감정이 높아졌다. 이에 천도교, 불교, 기독교 등 종교 지도자와 학생 대표들은 비밀리에 독립 선언과 대규모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
전국적인 만세 시위를 준비하던 종교계 인사들은 천도교의 손병희와 기독교의 이승훈 등을 주축으로 하고, 불교계의 한용운이 연합하여 33인의 민족 대표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우리의 독립을 선언하고, 대중적인 비폭력 운동을 전개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군중이 많이 모이는 고종의 국장일을 즈음하여 대규모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고, 민족 대표 33인의 이름이 적힌 독립 선언서를 종교 단체와 학생 조직을 통해 서울과 지방의 여러 도시에 몰래 배포하였다.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들은 탑골 공원에서 독립 선언서를 발표할 계획이었으나 시위가 과격해질 것을 우려하여 서울 종로의 태화관에 모여 독립 선언식을 하고 만세 삼창을 한 후 일본 경찰에 자진 체포되었다.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 있던 탑골 공원에서는 민족 대표가 나타나지 않자, 군중 중 한 명이 팔각정 단상에 올라가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후 학생과 시민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종로를 행진하였다. 여기에 고종의 국상에 참석하러 모여든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만세 시위는 서울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비슷한 시간에 평양, 의주, 원산 등 전국의 여러 도시에서도 독립 선언과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일제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시위 군중을 해산하려 하였으나, 만세 시위는 계속되었다.
만세 시위의 발전과 일제의 탄압
만세 시위는 전국의 주요 도시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시위가 확산 되면서 학생과 시민들이 주도하던 시위는 점차 노동자와 농민층이 주도하였으며, 시위도 점차 조직화되었다. 학생들은 독립 선언서를 배포하거나 동맹 휴학을 이끌었고, 노동자들은 파업을 벌이며 만세 시위에 동참하였다. 상인들은 일제히 가게 문을 닫아 만세 시위를 지지하였다.
3월 중순을 지나면서 만세 시위는 도시에서 농촌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농촌에서는 주로 장날에 장터를 중심으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무단 통치 아래 일제의 민족적 차별과 각종 부역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유생과 마을 이장이 만세 시위를 주도하기도 하였다.
전국적인 만세 시위에 당황한 일제는 만세 시위를 무력으로 탄압하였다. 일제는 헌병 경찰뿐 아니라 군대, 소방대, 재향 군인회 등을 동원하여 총칼로 시위대를 진압하였고, 시위 주동자나 참여한 사람을 체포하여 고문하였다. 이에 따라 평화적 만세 시위는 점차 무력 저항으로 바뀌었다. 농민을 중심으로 군청, 면사무소, 헌병 경찰 주재소 등 식민 통치 기관을 습격하였으며, 수탈에 가담한 일본인 지주와 상인, 고리대금업자 등을 응징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시위가 격렬해지자 화성 제암리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무자비하게 한국인을 학살을 자행하였다.
국외의 한국인들도 독립을 위한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일본 도쿄의 유학생들은 3・1 운동 봉기 소식을 듣고 만세 시위를 펼쳤으며, 오사카의 동포들도 만세 시위를 벌였다.
만주에서는 서간도의 삼원보에서 가장 먼저 만세 시위가 일어났고,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서도 만세 시위가 벌어졌다. 시베리아와 중국의 상하이에서도 만세 시위가 잇따랐다.
미주 지역에서도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하와이 호놀룰루에서는 대한인 국민회가 전체 동포 회의를 열어 독립 선언식을 하였다. 미국 본토의 필라델피아에서는 1919년 4월에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시가행진을 벌였다.
3・1 운동의 의의
학생과 시민들이 시작한 3・1 운동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온 겨레가 참여한 거국적 민족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3・1 운동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한국인을 결집하고, 한국인의 단합된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신분, 직업, 종교 등의 구별 없이 모든 계층이 참여한 일제 강점기 최대의 민족 운동이었다. 또한 3・1 운동은 일제의 통치 방식에 영향을 주어, 헌병 경찰제와 같은 폭력적인 무단 통치에서 이른바 '문화 통치'로 바꾸었다.
3・1 운동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좌절되었지만 이후 독립운동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3・1 운동을 계기로 민족 지도자들은 독립운동을 지도할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각지에 임시 정부를 세웠고, 이들 정부는 이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통합되었다.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무장 독립군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만세 시위에 참여한 노동자와 농민, 청년, 여성들은 민족 운동에서 자신의 역할을 깨달았고, 이후 각종 단체를 만들어 다양한 민족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또한, 3・1 운동은 중국의 5・4 운동 등 세계 약소민족의 반제국주의 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국경일] 3・1절(삼일절) 역사, 의의, 인물 알아보기
3・1절 3・1절은 1919년 3월 1일에 전 세계에 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하는 평화적 시위로 전개된 3・1 운동을 기념하는 날로 대한민국의 국경일입니다. 올해는 3・1절 제105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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