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사상의 보급과 민족 유일당 운동
신간회는 1927년 경성에서 자치 운동 움직임에 반대한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중심이 되어 창립한 국내의 대표적인 민족 협동 전선이었다. 또한 일제 강점기 최대 규모의 합법적 사회 운동 단체였다.
사회주의의 유입과 확산
러시아 혁명을 계기로 연해주와 일본 등지의 한국인 사회에서 사회주의가 받아들여졌다. 국내에서도 3・1 운동 이후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청년과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사상이 확산되었으며, 독서회를 중심으로 사회주의 서적을 읽고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였다. 국내 사회주의자들은 국외 사회주의자들과 긴밀한 연관을 맺으면서 조직을 확대하여 1925년에 조선 공산당을 결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민족 운동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로 분화되었다.
사회주의 운동안 사유 재산 제도에 바탕을 둔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하였고, 농민과 노동자를 단결하여 일제를 타도하려 하였다. 이에 일제는 1925년에 치안 유지법을 만들어 사회주의 세력을 강력하게 탄압하였다. 그러나 조선 공산당은 1928년 말까지 국내에서 각종 사회 운동을 이끌었다.
민족 유일당 운동
민족 운동 전선의 통일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을 무렵, 코민테른이 민족주의자와의 협력을 중시하는 방침을 채택하였고 중국에서는 제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이는 국내외 독립운동가에 영향을 주어 이념과 노선을 초월한 민족 유일당 운동이 나타났다.
국외에서는 민족 유일당 운동의 일환으로 베이징에서 한국 독립 유일당 북경 촉성회가 결성되었고, 만주 지역에서는 3부 통합 운동이 진행되었다.
한편 국내에서는 1920년대 일제가 자치 운동을 지원하면서 일부 민족주의자가 일제와 타협하여 자치권을 얻을 것을 주장하였다.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이를 비판하면서 즉각적인 독립을 주장하였고, 사회주의 세력과 손을 잡으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치안 유지법으로 탄압을 받던 사회주의 세력에서도 민족주의 세력과 연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에 1926년 7월에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일부 사회주의 세력이 연합하여 조선 민흥회를 만들었다. 그해 11월에는 사회주의 계열인 정우회가 '정우회 선언'을 발표하여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제휴할 것을 주장하였다.
신간회
신간회 창립
국내 민족 유일당 운동의 결과 1927년에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연합한 최초의 합법적인 민족 협동 전선 단체인 신간회가 결성되었다.
1927년 2월에 신간회는 창립 대회를 열어 회장에 이상재, 부회장에 홍명희를 선출하고 강령을 채택하였다. 합법 단체인 신간회는 경성에 본부를 두고 전국 각지에 지회를 두었으며, 140여 개의 지회와 4만여 명에 이르는 회원을 보유한 대중적 정치・사회단체로 성장하였다. 국내뿐만 아니라 만주, 일본에도 지회를 두어 활동하였고, 여성 단체들도 사회주의 계열과 기독교 계열 중심으로 통합을 이루어 근우회를 결성하였다.
신간회 활동
신간회는 합법적인 공간을 활용하여 한국인 본위의 교육 실시, 식민지 교육 반대, 타협적 정치 운동 반대 등을 주장하고 일제 식민 통치의 야만성을 규탄하였다. 각 지회를 중심으로 순회강연을 열어 전국을 다니며 민중을 계몽하였으며, 노동 운동과 농민 운동, 여성운동, 형평 운동, 수재민 구호 활동과 만주 동포 옹호 운동 등 다양한 사회 운동에도 관심을 가지고 지원하였다.
신간회는 1929년에 일어난 원산 총파업을 지원하고, 갑산군 화전민 사건 등에 개입하여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지방의 신간회 지회는 청년 단체나 농민 조합은 물론 신문사 지국과 함께 지역의 여러 사회 운동 단체와 연대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거나 민족의 이익을 보호하는 활동을 벌였다.
또한, 1929년 11월에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나자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고, 일제의 학생 운동 탄압에 항의하였다. 그리고 사건의 진상 보고를 위한 민중 대회를 열어 한국 학생에 대한 차별 조치를 강력히 규탄하고 이를 전국적인 항일 운동으로 확산 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신간회 간부들이 체포되었고, 민중 대회는 열리지 못하였다.
신간회 해소
민중 대회 사건 이후 새로 구성된 신간회 집행부는 기회주의를 부인한다는 신간회의 강령과는 다르게 일제와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고 온건한 방향으로 활동을 전환하려 하였다. 심지어 타협적 합법 운동을 강조하자 사회주의자들은 이에 반발하였다.
대공황 이후 노동자와 농민의 쟁의가 격렬해지자 사회주의자들과 코민테른은 계급 투쟁을 강조하였다. 코민테른은 중국에서 제1차 국・공 합작이 실패한 것을 계기로 사회주의자들에게 민족주의 계열과의 협동 전선 해체를 지시하였다. 이러한 코민테른의 노선 변화에 영향을 받은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민족 협동 전선을 비판하였다. 또한 이들은 신간회가 혁명 운동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이유로 해소를 주장하였다. 신간회의 해소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은 신간회 해소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였으나, 1931년 5월 열린 전체 대회에서 신간회 해소안을 채택하여 신간회는 해체되었다.
신간회가 해소된 이후 사회주의 계열은 혁명적 노동조합과 농민 조합을 만들어 반제국주의 항일 투쟁에 집중하였고,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은 조선학 운동 등 문화 학술 활동을 통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신간회는 대중으로부터 큰 지지를 받은, 국내에서 조직된 최대의 항일 운동 단체였다. 신간회의 결성은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이념과 노선의 차이를 극복하여 민족 협동 전선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역사 >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사] 근대 사상의 유입과 사회 운동 (2) | 2024.01.17 |
---|---|
[한국사] 도시와 농촌의 변화 (1) | 2024.01.17 |
[한국사] 실력 양성 운동 (0) | 2024.01.16 |
[한국사] 무장 독립 투쟁과 의열 투쟁 (2) | 2024.01.15 |
[한국사] 대한민국 임시 정부 (2) | 2024.0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