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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근대 사상의 유입과 사회 운동

근대 사상의 유입과 사회 운동 

평양의 고무 공장 노동자였던 강주릉은 1931년 회사의 일방적인 임금 삭감에 반발하여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파업하였다. 경찰이 이들을 강제로 끌어내자, 강주릉은 약 11m 높이의 을밀대 지붕 위로 올라가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지붕 위에 올라왔습니다. 임금을 삭감하겠다는 입장을 철회하기 전에는 내려가지 않겠습니다."라며 농성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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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사상의 유입과 사회 운동

 

근대 사상의 확산

     일제 강점기에는 복벽주의를 넘어 주권 재민에 기초해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고자 하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이념인 공화주의가 자리 잡았다.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등은 1917년에 '대동단결 선언'을 발표하여 국민 주권의 공화주의 이념을 공식 문서화하였다. 공화주의는 이후 더욱 구체화되었으며, 1919 '기미 독립 선언서'에도 반영되는 등 독립운동의 보편적인 사상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3・1 운동이 일어날 무렵에는 국가주의에 대한 반발과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전 세계적으로 정의와 인도, 자유와 평등을 내세우는 사조가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그 핵심에는 사회 개조 사상사회주의, 자유주의가 깔려 있었다. 개조론은 정치 활동을 할 수 없던 상황에서 계몽을 통해 근대화를 이루려는 문화 운동의 토대가 되었지만, 사회주의의 유입으로 사상적 주도권을 잃어갔다.

     사회주의는 3・1 운동 이후 국내에 유입되었는데, 지식인들은 신문과 잡지에 사회주의를 소개하는 글을 싣고, 토론회와 강연회 등을 개최하여 사회주의를 알렸다. 여성의 권리와 지위 향상을 꾀하는 페미니즘도 자리를 잡아 갔다. 이러한 사상이 확산되면서 각계각층에서는 다양한 사회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농민 운동

     1910년대 일제가 실시한 토지 조사 사업으로 토지를 상실한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국외로 이주하여 힘겨운 생활을 이어 갔다. 1920년 시작된 산미 증식 계획으로 농민의 몰락이 가속화되자, 농민들은 소작인 조합을 중심으로 쟁의를 벌였다. 또한, 사회주의의 유입으로 농민을 옹호하는 단체들이 결성되어 농민 운동을 지원하였다.

     1920년대 농민 운동은 소작료 인하, 지세 부담 전가 반대, 소작권 이동 반대 등 생존권을 요구하는 소작 쟁의가 주를 이루었다. 소작 쟁의는 지주제가 상대적으로 발달한 전라도와 경상도, 황해도와 평안도 등지에서 많이 일어났다. 전국 각지의 동양 척식 주식회사 농장과 일본인 농장에서도 대규모 쟁의가 이따랐다. 1923년에 일어난 암태도 소작 쟁의에서 암태 소작인회는 지주와 일본 경찰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싸웠으며, 마침내 소작료를 낮추는 성과를 거두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농민 운동은 더욱 발전하였다. 농민 의식이 높아지고, 자작농의 가입이 늘면서 소작인 조합은 일반 농민을 망라하는 농민 조합으로 개편되었다. 농민 운동은 1927년에 결성된 조선 농민 총동맹의 지원으로 규모와 조직면에서 한층 발전하였다.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1930년대 농민 운동은 사회주의와 연계하여 비합법 조직인 혁명적 농민 조합을 중심으로 펼쳐졌으며 1930년대 중반에는 일제의 관공서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일제는 중・일 전쟁 이후 강제로 소작 쟁의를 봉쇄하였다. 

 

 

 

 

노동 운동

     일제 강점기 식민지 공업화에 따라 공장이 늘어나며 노동자의 수도 증가하였다. 한국인 노동자는 열악한 노동 환경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지만, 일본인에 비해 낮은 임금과 차별 대우를 받았다. 노동자들은 이런 불합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노동 운동을 펼쳤다. 또한, 사회주의가 보급되면서 여러 노동 단체가 결성되어 노동 운동을 지원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20년대에 노동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1920년대 전개된 노동 운동은 노동자의 삶과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한 생존권 투쟁 성격이 강하였다. 1921년 부산 부두 노동자 파업을 시작으로 1922년 경성 인력거꾼의 파업, 경성 양화 직공의 동맹 휴업, 경성 고무 여공의 파업 등이 일어났다. 

     192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노동 운동은 참가 인원이 증가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926년에 일어난 목포 제유 공장 노동자의 파업과 1927년 영흥 흑연 광산 노동자의 파업은 수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노동 운동은 1929년 원산 총파업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1928년에 석유 회사인 라이징 선에서 시작된 파업은 1929년 1월 원산 지역 노동자 총파업으로 이어졌다. 파업 기간 중 국내는 물론 국외의 노동 단체까지 원산 총파업에 격려와 지지를 보내왔다. 하지만 일제가 경찰과 군대, 깡패까지 동원하여 탄압하면서 원산 총파업을 결국 실패로 끝이 났다.

     1930년대 들어 일제의 통제가 강화되면서 노동 운동은 사회주의자와 연결된 비합법 조직은 혁명적 노동조합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중・일 전쟁 이후 일제가 탄압을 본격화하면서 노동 운동은 점차 줄어들었다. 

 

 

 

 

청년・학생 운동

 청년 운동

     3・1 운동으로 민족의식이 높아지고, 민족 운동에서 청년 학생의 역할이 새롭게 인식되었다. 또한, 사회주의 등 다양한 사상도 들어왔다. 이 영향으로 청년의 수양과 계몽, 민족 생활 개선을 표방하는 청년 단체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나뉘어 있던 청년 단체는 1924년 조선 청년 총동맹이 결성되면서 전국적인 조직으로 통합되어 갔다. 조선 청년 총동맹은 노동 운동과 농민 운동을 지지하고 일제의 식민 교육에 맞서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6・10 만세 운동

     1920년대 중반 사회주의 세력은 꾸준히 성장하였다. 학생들도 동맹 휴학 등을 벌여 일제의 식민지 교육에 저항하였다. 그러던 1926년 4월에 대한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민족 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사회주의 계열 단체와 천도교, 학생들은 순종의 인산일인 1926년 6월 10일에 대규모 만세 운동을 벌일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회주의 계열의 시위 계획이 일제에 발각되고, 수많은 애국지사가 검거되며 위기를 맞았다. 일제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서울 지역에 삼엄한 경비를 펼쳤다.

     그러나 학생들은 예정대로 시위 계획을 추진하였다. 6월 10일에 학생들은 미리 준비한 격문을 뿌리며 서울 곳곳에서 만세 운동을 벌였다(6・10 만세 운동). 인산 행렬에 참여한 시민들이 가세하면서 시위가 확산되어 순종의 장례가 지나가는 곳마다 학생과 시민들의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소식을 전해 들은 여러 지역의 학생들도 동맹 휴학을 벌여 6・10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일제가 시위를 강경하게 진압하면서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200명 이상이 검거되었다. 

     6・10 만세 운동은 준비 과정에서 천도교 등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함께 참여하여 통일된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이후 민족 유일당 운동이 추진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 또한 학생들이 주도하는 항일 운동이 더욱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6・10 만세운동 재판을 보도한 신문기사 사진
출처: 동아출판 고등학교 한국사

 

 

 

 

광주 학생 항일 운동

     6・10 만세 운동을 계기로 학생 운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학생들은 독서회 등을 바탕으로 각종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다양한 토론과 학습을 하였고, 동맹 휴학 등 저항 운동을 벌였다.

     학생 운동은 처음에는 학내 문제의 개선을 요구하는 것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점차 식민지 교육 철폐, 한국인 본위의 교육 제도의 확립, 한・일 학생 간의 차별 철폐 등을 요구하는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광주발 통학 열차가 나주에 도착했을 때 일본인 남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하면서 한・일 학생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일제 경찰이 이 사건을 일본인 학생에게 유리하게 처리하면서 한국인 학생들의 불만은 높아졌다. 그리고 1929년 11월 3일에 열린 일왕의 생일 기념식으로 한국 학생들의 반일 감정이 높아진 가운데 다시 일본 학생과 한국인 학생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광주 지역의 학생들은 격문을 뿌리며 궐기하였다(광주 학생 항일 운동).

     광주에서 시작된 항일 학생 운동은 목포와 나주로 확산되었으며, 12월에는 서울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학생들은 '식민지 교육 철폐', '일본 제국주의 타도', '민족 해방'을 주장하였ㅇ며, 1930년 3월까지 전국에서 시위와 동맹 휴학을 지속하였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전국에서 320개 교, 수만 명의 학생이 참여한, 3・1 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민족 운동이었으며 이후의 학생 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 신문기사 사진
출처: 동아출판 고등학교 한국사

 

 

 

 

여성 운동

     일제 강점기에는 여성의 지위가 더욱 약화되었다. 일제는 재산・친권 상속 등에서 여성을 차별하는 법률을 시행하였다. 결혼한 여성은 남편의 허락을 받아야만 취업을 할 수 있었고, 여성 노동자는 남성 노동자에 비해 적은 임금을 받았다. 

     근대 교육을 받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과 여성 해방을 목표로 여러 여성 단체가 결성되었다. 1920년대 초에 조직된 조선 여자 청년회, 조선 여자 교육회, 조선 여자 기독교 청년회 연합회 등은 사회 개조와 신문화 건설을 위해 여성의 계몽과 교육이 우선이라고 판단하였으며, 문맹 퇴치, 생활 개선 등의 활동을 펼쳤다.

     사회주의 영향으로 조선 여성 동우회 등 사회주의 계열 단체도 조직되었다. 이들은 여성 해방을 위한 청년 여자의 단결, 청년 여자의 대중적 교양과 조직적 훈련을 방침으로, 여성 해방과 사회주의 운동을 결합하려 노력하였다. 

     1927년 5월에는 신간회 결성에 자극을 받아 '조선 여자의 공고한 단결과 지위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민족 협동 단체인 근우회가 창립되었다. 근우회는 기관지 '근우'를 발간하고 순회강연을 열어 여성 의식 향상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노동・농민 운동 등 사회 운동과의 연대를 모색하였다.

 

 

 

 

소년 운동

     일제 강점기에 아이들의 지위는 여성과 마찬가지로 열악하였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교육의 기회를 가지지 못하였고, 공장이나 농촌에서 적은 임금을 받으며 오랜 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이러한 가운데 어린이를 소중히 여기고 바르게 키우자는 소년 운동이 일어났다. 

     3・1 운동 이후 어린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1920년에 진주 지역 천도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진주 소년회를 조직하였다. 소년 운동은 1921년 서울에서 방정환을 중심으로 천도교 소년회가 조직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방정환은 아이들을 인격체로 대하라는 의미에서 '어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후 천도교 소년회는 1922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고 기념식을 거행하였으며, ⌜어린이⌟라는 잡지를 발간하였다. 이를 계기로 소년 운동은 더욱 확산되어 1927년에는 전국적인 조직체로 조선 소년 연합회가 결성되었다. 

 

 

 

 

형평운동

     갑오개혁으로 법적으로는 신분 차별이 사라졌지만, 백정에 대한 차별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일제 강점기에도 지속되었다. 호적이 직업이 백정으로 기록되었으며, 자녀의 학교 입학이 거부되기도 하였다. 학교에 들어간 후에도 차별을 받았다.

     이에 백정들은 1923년에 경남 진주에서 조선 형평사를 조직하고,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 철폐를 주장하는 형평 운동을 펼쳤다. 조선 형평사는 전국으로 조직을 확대하여 1925년에는 본부를 서울로 옮기고 형평사 전조선 대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백정들은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 철폐, 자녀에 대한 동등한 교육 실시, 모든 회원의 단결, 기타 사회 문제 등에 대하여 논의하고 의견을 모았다.

     조선 형평사는 1927년에는 전국에 지사와 분사를 두고, 회원이 7천여 명에 달하는 단체로 발전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다른 사회 운동 단체와 협력하면서 파업, 소작 쟁의 등에 참가하는 등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말부터 내부적으로 이념 갈등을 겪으며 조직이 약화되었고,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회원의 친목 도모와 경제적 이익 추구를 중심으로 활동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