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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대중문화 유행 및 문예 활동의 전개

대중문화 유행 및 문예 활동의 전개 

레코드는 소리를 기록하였다가 축음기에 올려서 재생하는 원반 형태의 음반으로, 국내에는 개항 이후 유입되었다. 이후 1920년대 대중가요가 유행하고 축음기가 보급되면서 레코드를 찾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났다. 레코드를 축음기에 재생하면 공연장에 가지 않고도 음악을 들을 수 있어 레코드는 인기 있는 문화 상품 중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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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유행 및 문예 활동의 전개

 

연극과 영화

     일제 강점기 연극에서는 일제의 탄압으로 판소리, 가면극 등 전통적인 공연이 위축되었고, 이수일과 심순애의 비극적인 사랑을 다룬 ⌜장한몽⌟과 같은 신파극이 인기를 끌었다. 3・1 운동 이후에는 토월회가 민중 계몽을 주장하며 신극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대에는 극예술 연구회가 만들어져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연극을 공연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 전용 극장인 동양 극장이 만들어졌다.

     영화는 192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대중문화의 한 분야로 자리매김하였다. 1924년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 제작사인 조선 키네마가 설립되면서 한국인들의 영화 제작도 점차 활기를 띠었다. 1926년에는 나운규가 영화 아리랑⌟ 을 발표하여 영화 발전의 커다란 전기를 이루었다. 이 영화는 나라 잃은 민족의 울분과 설움을 그려 내어 대중의 큰 호응을 받았다. 1930년대에는 서양 영화가 영화관에서 상영되었으며, 변사가 대사를 읽던 무성 영화를 대신하여 유성 영화가 만들어졌다.

     연극과 영화가 대중에게 영향력을 발휘하자, 일제는 이를 탄압하면서도 자국의 침략 전쟁을 찬양하는 영화를 만들도록 강요하였다. 이에 따라 친일적 성향의 예술 활동이 늘어나기도 하였다.

 

 

 

 

문학과 예술 활동

     1910년대에는 이광수, 최남선 등의 주도로 계몽적 성격의 문학이 유행하였고, 3・1 운동을 계기로 다양한 문예 사조가 등장하였다. ⌜창조⌟, ⌜폐허⌟, ⌜백조⌟ 등의 동인지를 중심으로 한 낭만주의, 자연주의 문학과 식민지 현실에 관심을 둔 사실주의 문학이 함께 유행하였다. 1920년대 중반에는 사회주의 영향을 받은 신경향파 문학이 등장하였고, 1930년대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식민지 현실을 외면한 순수 문학 경향이 나타났다. 이육사, 윤동주 등은 저항 의식을 담은 문학을 발표하였다.

     음악계에서는 1920년대 이후 서양 음악의 영향으로 가곡과 동요가 만들어졌다. 이때 현제명이 ⌜고향 생각⌟, 윤극영은 ⌜반달⌟ 등 민족적 정서가 짙은 곡을 작곡하였다. 한편, 해외에서 활동하던 안익태는 1936년 ⌜애국가⌟를 작곡하였다. 미술계에서는 이상범, 안중식, 이응노 등이 한국 전통 회화를 계승하여 발전시켰고, 고희동에 의해 정착된 서양화는 김관호, 나혜석, 이중섭 등이 이어 갔다.

 

 

 

 

대중가요와 대중 잡지

     윤심덕이 노래한 ⌜사의 찬미⌟의 유행과 축음기, 레코드, 라디오의 보급으로 대중가요가 유행하였다. 1930년대 중반에는 트로트라 불리는 대중가요가 등장하여 인기를 얻었다. 이 밖에도 판소리가 창극에 의해 전승되고 성장하였다.

     1920년대에는 대중을 대상으로 한 종합 잡지가 많이 발간되었다. 1920년대 초・중반 천도교에서 발간한 ⌜개벽⌟은 정치, 사회, 문학 등을 다루었고, 1926년에는 취미 등을 위주로 한 ⌜별건곤⌟이 창간되었다. 여성들은 ⌜삼천리⌟, ⌜신여성⌟ 등을 통해 유행의 흐름을 따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에는 각종 잡지에 일제의 침략 전쟁 미화, 내선일체에 동조하는 친일 논조의 기사가 실리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