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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도시와 농촌의 변화

도시와 농촌의 변화 

신여성은 개항 이후 근대 교육을 받은 여성들로 1920~1930년대 한국에서 도시를 중심으로 형성된 소비문화를 수용한 주체 중의 하나였다. 이들은 뾰족구두, 단발머리 등 서양식 옷차림을 하고 쇼핑과 외식을 즐겼다. 

 

썸네일 도시와 농촌의 변화
도시와 농촌의 변화

 

식민지 근대화의 실상

     일제는 식민 통치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한국에 근대 문물과 제도를 확산시켰다. 그 과정에서 ‘일본인은 우월하고, 한국인은 열등하다.’라는 의식을 조장하여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기도 하였다. 일제는 도시에 신작로를 내고 전차 선로와 철도, 항만을 부설하는 등 근대 시설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일본인이 도시의 경제권을 장악하였고, 근대 문물의 혜택은 일본인과 일부 부유한 한국인만이 누릴 수 있었다. 대다수 한국인은 일제의 경제 수탈에 시달렸고, 일제가 근대 문물 도입을 위해 각종 세금을 부과하면서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교통의 발달

     1928년 일제는 함경선을 개통하면서 한반도를 X 자로 관통하는 철도망을 완성하였다. 철도의 부설로 지역 간의 이동이 편리해졌고, 철도 교통의 중심지에는 새로운 도시가 성장하였다. 또한, 사람들의 공간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운행 시간이 규칙적이고 정확한 철도를 이용하면서 근대적 시간관념이 정착하는 것을 촉진하였다. 하지만 철도는 일제가 한반도의 각종 자원을 수탈해 가는 길이었을 뿐 아니라, 만주와 중국으로 침략 전쟁을 확대해 가는 군사적 수단이었다. 

    도시에서는 전차 노선이 확충되었으며, 택시와 버스 등 새로운 교통수단이 등장하였다. 교통수단의 확충은 도시 사람들의 삶을 편리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인력거를 몰던 서민들은 일자리를 잃고, 공장 노동자가 되거나, 날품팔이 등 다른 일거리를 찾아야 하였다.

 

 

 

 

도시 발달과 도시 빈민의 형성

     일제 강점기 교통의 발달과 공업화로 도시화도 진전되었다. 1910년대 이후 개항장이 도시로 성장하였고, 철도 부설로 기차역이 세워진 대전, 신의주 등이 발전하였다. 1930년대 이후에는 함흥, 청진 등 북부 지방의 공업 도시가 성장하였다. 또한 군산, 목포 등은 항만 도시로 번성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도시화는 일제의 필요에 따라 진행된 비정상적인 도시화였다. 일제의 필요에 따라 전통 도시가 주변화되고, 새로운 도시가 성장하였다.

     한편 이 시기 도시에서 일본인 거주지와 한국인 거주지는 분리되어 있었다. 서울에서는 청계천을 중심으로 북쪽의 북촌에는 한국인이, 남쪽이 남촌에는 일본인이 주로 거주하였다.

     지금의 충무로를 중심으로 한 남촌은 관공서, 은행, 상점, 백화점 등이 집중해 있어 경성의 중심지로 성장하였고, 도로나 가로등 등 근대 문물이 들어오며 도시의 모습도 달라졌다.

     하지만 도시로 몰려든 농민들은 대부분 도시의 변두리에 빈민촌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토막집을 짓고 살았고, 지게 품팔이와 넝마주이를 하면서 힘든 삶을 이어갔다. 

 

 

 

 

산업 구조의 변화와 노동자의 삶

     1920년대 일제는 자국의 공업 성장으로 발생한 잉여 자본을 투자하기 위해 한국의 식민지 공업화가 필요하였다. 회사령의 폐지로 한국인들이 기업을 세우고 일본 기업이 한국에 진출하면서 공장이 늘어났다. 그러나 한국인 기업 수와 자본금은 일본인 기업에 비해 적었고, 한국 기업은 양말, 고무신 등 조선 총독부의 공업 정책과 관련이 적은 분야에서 성장하였다. 또한 이 시기 국내에 세워진 공장은 방직 공업이나 식료품 공업 등 경공업 중심이었다. 1930년대 들어 일제의 공업화 정책으로 1차 산업의 비중이 줄고 광공업과 서비스 산업의 비중이 증가하였다. 중일 전쟁 이후에는 한국의 병참 기지 역할에 따른 석탄 액화, 제철, 기계 등 군수 공업과 관련된 중화학 공업이 발달하였다.

     일본인 노동자가 고급 공업 기술을 독점하는 데 비해, 한국인 노동자는 단순 노무직을 맡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인 노동자는 일본인 노동자보다 적은 임금을 받으며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고, 여성과 미성년 노동자의 노동 환경은 더욱 열악하였다.

 

 

 

 

농촌의 개편과 농민의 삶

     일제 강점기 농촌에서는 식민지 지주제가 강화되었다. 일부 한국인 지주층과 부농층은 일제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면서 영농 규모를 늘려 갔다. 일제의 이민 정책으로 일본인 이민도 늘어났다. 일본인, 일본 기업 등은 비옥한 토지를 사들여 한국인 소작농에게 소작을 시켜 큰 이익을 얻었다.

     반면 대다수 농민은 높은 소작료와 각종 식민지 농업 정책에 따른 비용, 세금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고리대에 따른 피해도 가중되었다. 

     식민지화와 더불어 자본주의 상품 경제도 농촌에 본격적으로 침투하였다. 확대된 철도, 도로, 해운은 한국의 자원과 농산물을 일본으로 가지고 가고, 일본 상품을 한국 농촌에 들여오는 통로 역할을 하였고, 이는 한국 농촌을 일본 자본주의에 강하게 예속시켰다. 농민들은 새롭게 등장한 물건을 구매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들이 생산한 물품을 헐값에 팔아야 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농민이 자작농에서 자소작농으로, 자소작농에서 토목 공사장이나 광산 노동자로 몰락하였다. 경작지를 잃은 농민들은 생계를 위해 소작농이나 화전민이 되었으며, 일부는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여 토막민이 되기도 하였다. 또 일부는 해외로 이주하는 길을 택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 초에는 대공황의 영향을 받아 농촌 경제가 피폐해지고, 소작 쟁의가 확산되자 조선 총독부는 한국 농민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1932년부터 농촌 진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이는 농민 의식 계몽, 농촌 생활 개선에만 치중하였고, 농촌 문제를 해결할 구조적 개혁은 외면하여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34년에는 조선 농지령을 제정하여 농촌 경제를 안정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 운영 과정에서 소작농 관리자(마름)의 횡포를 통제하지 않고 지주의 권리를 옹호하였다. 게다가 소작료도 여전히 높아서 법령의 제정만으로 농촌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웠다. 

 

 

 

 

생활양식의 변화

     근대화를 목표로 전개된 민족의 계몽 운동뿐만 아니라 일제의 강제에 의해 전통 사회 구조와 생활양식이 변화하였다. 조선 총독부는 식민지 규율을 확립하려는 목적으로 생활 개선을 추진하였다. 삼림령을 제정하여 산에서 땔감 채취를 제한하였고, 새로운 도량형을 강요하고 양력 사용을 권장하였다.

     한편, 일제 강점기에는 근대 문물이 유입되면서 의식주 생활에 변화가 나타났다. 의생활에서는 고무신, 운동화, 구두, 양복 등이 확산되었고, 여학생들 사이에는 단발머리가 유행하는 등 서양식 복장이 점차 보편화되었다. 일제는 흰옷 대신에 색깔 있는 옷을 입게 하였고 중일 전쟁 이후에는 남성에게는 국민복을, 여성에게는 몸뻬라는 근로복을 입도록 강요하며 의복 생활을 통제하였다. 식생활에서는 커피와 빵, 아이스크림, 맥주 등 서양 식품이 소비되었고, 일본식 우동과 어묵이 낯설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일반 서민들은 쌀이 부족하여 잡곡밥이나 나무껍질 등을 먹기도 하였다.

     주생활에서는 1920년대부터 문화 주택이 도시를 중심으로 보급되었다. 하지만 농촌의 주택은 여전히 초가집이 대부분이었고, 토막민들은 도시 외곽에서 둑, 강가, 다리 밑 등지의 공터에 땅을 파고 짚이나 거적 같은 것을 둘러서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