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력 양성 운동
심훈의 소설 상록수는 주인공들이 일제의 탄압에도 농촌 계몽의 의지를 다지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인공들이 농촌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데, 그 모습을 '[가] 자에 ㄱ 하면 [각]하고, [나] 자에 ㄴ 하면 [난] 하면서 아이들이 제비 주둥이 같은 입을 일제히 벌렸다 오므렸다 한다.'라고 표현하였다. 이 작품에는 당시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과 희망이 나타나 있다.
물산 장려 운동
3・1 운동 이후 일부 지식인들은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먼저 민족의 실력을 키워야 한다고 보았다. 이들은 언론을 통한 국민 계몽과 문맹 퇴치 운동, 민립 대학 설립 운동 물산 장려 운동 등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에 회사령이 철폐되면서 한국인의 회사 설립이 활발해졌다. 경성 방직 주식회사, 평양 메리야스 공장 등이 세워졌고, 금융에서는 삼남은행도 설립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자본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였고, 한국인 기업은 자본과 기술에서 우위에 있는 일본 기업과 경쟁하며 점차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이에 한국인 자본가 등은 조선 총독부에 한국인 중심의 산업 정책을 추진할 것을 요청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게다가 조선 총독부는 면직물과 주류를 제외한 일본에서 수입되는 모든 상품의 관세를 없애려 하였다. 한국과 일본 사이의 관세가 철폐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한국인 자본가들의 위기의식이 높아졌다. 이에 민족 사업과 자본을 보호・육성하여 민족 경제의 자립을 이루자는 물산 장려 운동이 전개되었다. 조만식 등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은 1920년에 평양에서 조선 물산 장려회를 발족하고 국산품 애용 운동을 펼쳤다. 이어 서울에서도 물산 장려회가 발족되는 등 물산 장려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청년 단체, 여성 단체도 적극 참여하였다.
물산 장려 운동은 '내 살림 내 것으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민족 산업을 보호하고 성장시키기 위해 토산품 애용, 근검저축, 금주, 금연 등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이 운동은 한때 민중의 폭넓은 공감과 지지를 받았고, 민족의식을 높이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기업의 생산량이 수요를 따르지 못해 상품 가격이 올랐다. 또한, 사회주의자들은 물산 장려 운동을 자본가의 이익만을 위한 운동이라 비판하기도 하였다. 물산 장려 운동은 점차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민립 대학 설립 운동
일제는 국권 침탈 후 한국인에게 보통 교육과 실업 교육을 주로 하였고, 고등 교육의 기회는 거의 주지 않았다. 조선 교육회 등은 조선 총독부에 대학의 설립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일부 민족주의 지식인들은 민족의 실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먼저 교육을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교육 분야의 실력 양성 운동으로 한국인의 힘으로 대학을 설립해 고등 교육을 실현하자는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 추진되었다.
1922년에 이상재 등이 중심이 된 조선 교육회의 제안으로 서울에서 민립 대학 기성회가 조직되었으며, '한민족 1천만이 한 사람이 1원씩'이라는 구호 아래 전국적인 모금 운동을 펼쳤다.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전국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으며, 해외에서도 모금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초기에는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나 일제가 민립 대학 설립을 막기 위해 감시와 탄압을 하였으며, 1924년과 1925년에 걸쳐 남부 지방을 휩쓴 가뭄과 전국적인 수해 등으로 모금 운동이 어려워져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실패하였다. 한편 일제는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고등 교육 수요를 충족하고, 한국인의 자발적인 대학 설립 운동을 무마하기 위해 1924년에 경성 제국 대학을 설립하였다.
문맹 퇴치 운동
일제의 차별적인 교육 정책으로 교육 기회를 얻지 못한 한국인 사이에 문맹자가 늘어났다. 이에 문자를 보급하여 민중을 계몽하고 생활을 개선하고자 하는 문맹 퇴치 운동이 일어났다.
1920년대에는 노동자와 농민을 대상으로 문맹 퇴치 활동이 펼쳐졌다. 이는 농촌 계몽 운동의 하나로, 일제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한글을 보급하는 활동이었다. 각지에서 야학이 설립되었으며, 한글 보급 강습회도 개최되었다. 조선일보는 1929년부터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라는 구호 아래 여름 방학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학생들과 함께 문자 보급 운동을 펼쳤다. 조선일보는 이 과정에서 한글 교재를 발간하여 농촌에 배부하였고, 문맹 퇴치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30년대 동아일보는 '배우자, 가르치자, 다 함께 브나로드'라는 구호를 제시하며 학생이 참여하는 농촌 계몽 운동인 브나로드 운동을 벌였다. 각 지방의 마을마다 야학을 만들어 한글을 가르쳤고, 미신 타파・구습 제거・근검절약 등을 강조하며 계몽 활동도 펼쳤다. 조선어 학회도 강습회를 열어 한글 보급에 나섰다. 그러나 일제는 이들 운동이 민족 운동을 고취할 조짐이 보이자, 농민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 준다는 이유를 구실 삼아 1935년부터 전면 금지하였다.
실력 양성 운동의 의의와 한계
물산 장려 운동과 민립 대학 설립 운동 등으로 전개된 실력 양성 운동은 민족 경제의 자립과 근대 교육의 보급, 전근대적인 의식과 관습의 타파, 신문화의 건설 등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를 선진 문명사회로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실력 양성 운동은 우리 사회의 근대적 발전을 추구하고, 민족의 실력을 키워 민족 독립의 토대를 마련하려 한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일제의 탄압에 쉽게 무너지는 경향을 보였고, '선 실력 양성, 후 독립'을 내세웠지만 점차 실력 양성만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바뀌어 갔다.
자치 운동과 참정권 운동의 대두
자치 운동과 참정권 운동의 대두실력 양성 운동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가운데 한편에서는 일부 민족주의 계열의 지식인, 지주, 자본가들이 일제의 식민 지배를 인정하고 정치적 실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광수, 최린, 김성수 등은 일제의 이른바 ‘문화 통치’에 기대를 걸면서 조선 총독부 아래에 자치 정부나 자치 의회를 만들게 해 달라는 자치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대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은 크게 비판하였다. 또한 일제가 3・1 운동 이후 일부 한국인들의 정치적 권리를 인정하려는 태도를 보이자, 일본 의회에 한국인 대표를 참여시키려는 참정권 운동도 일어났다.
이와 같이 일제와 타협하여 한국인의 정치적 권리를 얻으려는 움직임은 1930년대 초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이 운동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민족주의 세력의 분열을 초래하였고, 일제의 민족 분열 정책에 이용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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