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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민족 문화 수호를 위한 노력

민족 문화 수호를 위한 노력 

19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경주에 출전한 손기정 선수가 우승을 하자, 동아일보는 시상식 사진을 신문에 보도하면서 손기정 선수의 유니폼에 그려져 있던 일장기를 삭제하였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무기 정간 조치를 받았다. 이처럼 일제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왜곡하면서 한국인의 민족정신을 없애 식민 지배 체제를 강화하려 하였다. 

 

썸네일 민족 문화 수호를 위한 노력
민족 문화 수호를 위한 노력

 

한글 연구

     일제는 한국인을 일본에 동화시키기 위해 일본어를 보급하였다. 조선 총독부는 일본어를 국어라 부르고 우리말을 조선어라 부르면서 학교에서 일본어 교육의 비중을 크게 높였다. 중・일 전쟁 이후에는 민족 말살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 우리말 사용을 금지하였다. 1938년에는 제3차 조선 교육령을 발표하여 조선어를 필수 과목에서 선택 과목으로 변경하였고, 이후 학교 수업에서 조선어 과목을 폐기하였다. . 

     일제의 이러한 정책에 맞서 국어학자들은 한글 연구에 앞장섰다. 1921년에 이윤재, 최현배 등은 조선어 연구회를 만들어 한글날의 시초가 된 '가갸날'을 제정하고, ⌜한글⌟잡지를 간행하였으며 한글 연구와 보급 활동을 하였다. 조선어 연구회는 1931년 조선어 학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조선어 학회는 문자 보급 교재를 만들어 문맹 퇴치 운동을 지원하였고,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 외래어 표기법을 제정하였다. 이러한 한글 체계는 교과서, 신문, 성경 등에 널리 반영되어 점차 정착되어 갔다. 또한, ⌜우리말 큰사전⌟을 편찬하려 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좌절되었다.

     일제는 한글 연구로 민족의식이 고취되는 것을 막기 위해 조선어 학회를 독립운동 단체로 규정하여 1942년 조선어 학회 회원을 대거 검거하고 조선어 학회를 강제로 해산하였다(조선어 학회 사건). 

 

 

 

 

한국사 연구

     일제는 한국 침략과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사를 왜곡하였다. 총독부는 조선사 편수회를 설치하고, 한국의 역사를 왜곡하여 정리한 ⌜조선사⌟를 만들어 식민 사관을 퍼뜨리려 하였다. 식민 사관에서는 한국은 고려,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면서도 역사의 발전은 정체되어 고대 사회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정체성론을 주장하였다. 또한, 한국은 반도 국가로서 대륙이나 해양 세력의 간섭과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녔으며, 이로 인해 한국의 역사는 늘 중국과 일본 등 주변 국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왔다는 타율성론을 주장하였다. 이를 통해 일제는 우리 민족이 주체적으로 발전할 수 없으며, 자신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폈다.

     역사학계는 일제의 한국사 왜곡에 맞서 우리 역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박은식, 신채호 등은 민족주의 사학의 기초를 세웠다. 박은식은 국혼을 강조하며⌜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하여 일제의 침략과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를 정리하였다. 신채호는 고대사 연구에 주력하여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 등을 저술하였고,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신을 강조하였다. 1930년대에 이르러 민족주의 사학은 정인보, 문일평 등에 이어져 독립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고, 이들은 조선학 운동을 전개하였다.

     유물 사관의 입장에서 한국사를 연구하려는 사회 경제 사학의 흐름도 있었다. 유물 사관은 사회주의에 기초한 역사관으로, 역사 발전의 원동력을 물질적인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화로 보았다. 백남운은 ⌜조선사회경제사⌟를 저술하여 한국사가 세계사의 보편적인 발전 과정을 걸어왔음을 주장하고 식민 사관의 정체성론을 반박하였다.

     한편, 실증적 연구 방법으로 역사를 연구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병도, 손진태 등은 엄밀한 문헌 고증을 통해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하려 하였고, 1934년에 진단 학회를 조직하고 ⌜진단 학보⌟를 발행하여 연구 성과를 알려 나갔다.

 

 

 

 

종교계의 활동

     3·1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종교계는 일제의 회유와 탄압을 받으면서도 민족 운동과 사회사업, 교단 혁신 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대종교의 일부 신자들은 국권 피탈 이후 만주에서 중광단을 조직하여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천도교는 제2의 독립 선언 운동을 계획하기도 했으며(1922), ⌜개벽⌟, ⌜신여성⌟ 등의 잡지를 만들어 민족의식을 높였고, 청년·여성·소년 운동 등 대중 운동을 전개하였다. 천주교는 고아원, 양로원을 세우는 등 사회사업을 확대하였으며, 신자 중 일부는 만주에서 의민단을 조직하여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개신교는 교육과 의료 사업 등을 활발하게 전개하였고, 기독교 계통의 일부 학교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는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주기철 목사처럼 고문을 당해 순교하는 경우도 있었다. 

     불교에서는 일제가 한국 불교계를 장악하려는 목적으로 제정한 사찰령을 폐지하려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을 주도한 한용운은 이후 만당을 결성하여 항일 운동과 불교 개혁 운동을 이어 갔다. 원불교는 불교의 생활화와 대중화를 추구하면서 저축 운동, 허례허식 폐지, 금주, 단연 등 '새 생활 운동'을 전개하였다.

 

 

 

 

교육 활동

     일제는 제1차 조선 교육령(1911)을 발표한 이후 보통 교육과 실업 교육에 중점을 두고 사립 교육을 통제하였다. 보통학교에서 일본어와 일본 역사 교육을 강화하였으며, 수신(도덕) 수업에서 일본 국왕의 순종적인 신민이 될 것을 강요하고, 실업 교육을 실시하여 단순 기술을 익힌 노동자를 길러 냈다.

     일제의 이러한 교육 정책에 맞서 민족 운동가들은 우리말과 우리 역사를 가르쳐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게 하려는 민족 교육 운동을 전개하였다. 사립학교와 강습소, 야학, 개량 서당 등을 세워 민족 교육을 행하였다. 일부 학생과 지식인은 야학을 열어 농민과 노동자 등을 대상으로 민족의식과 사회의식을 고취하였다.

     1920년 한규설, 이상재 등이 조직한 조선 교육회는 민립 대학 설립 운동과 한국인 본위의 교육 실현을 위해 활동하였고, 차미리사 중심의 조선 여자 교육회는 여성 교육 보급과 여성 해방을 위해 노력하였다.

 

 

 

 

언론 활동

     일제는 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 외에 신문의 발행을 허가하지 않았으나, 3·1 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 통치’를 표방하면서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한국인의 신문 발행을 허가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계몽 활동을 전개하자 정간, 압수, 삭제 등의 방법으로 한글 신문을 통제하였다.

     1936년에는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총독부가 동아일보에 무기 정간 조치를 내렸다. 중일 전쟁 이후 일제는 언론에 대한 간섭과 통제를 더욱 강화하였고, 언론도 이에 순응하여 점차 친일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총독부는 황국 신민화에 방해가 되는 언론사를 탄압하였고, 결국 1940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폐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