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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인물] 고려 명장 양규 | 3만명을 구출하고 장렬히 전사한 영웅

양규(楊規)

미상 ~ 1011년 3월 5일(음력 1월 28일)

 

양규(楊規)는 고려의 무장으로 제2차 고려 거란 전쟁 때 도순검사(都巡檢使)로서 활약하였고, 1024년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으로 추봉 되었다.

 

썸네일 양규
고려 명장 양규

 

양규의 대활약

     강조의 정변(1009년)으로 목종이 폐위당하고, 현종이 옹립되자 그것을 명분으로 삼아 거란 황제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쳐들어왔다(제2차 고려 거란 전쟁, 1010년 11월). 현종 원년 제2차 고려 거란 전쟁 당시 양규는 도순검사(都巡檢使)로 흥화진에 부임해 있었고, 흥화진사 정성(鄭成), 흥화진부사 이수화(李守和), 판관 장호(張顥) 등과 함께 3천 명의 병력으로 성을 지키고 있었다.

 

     첫 번째 전투는 흥화진(興化鎭)에서 벌어졌다. 11월 17일부터 일주일간 거란의 성종은 양규가 지키고 있던 홍화진을 맹렬히 공격했으나, 양규와 3천 명의 고려군이 이 거센 공격을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거란 성종은 통주성 인근에서 고려 백성을 잡아 흥화진에 회유의 편지를 전하게 했다. 편지에는 '거란을 섬기던 목종을 시해 한 강조를 벌하기 위해 온 것이다. 강조를 체포하여 보내면 군대를 돌릴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모두 죽은 목숨이다. 강조에게 협박에 어쩔 수 없이 따랐던 자들은 모두 용서해 주겠다'라고 하였다. 흥화진을 지키던 양규와 이수화 등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거란 성종은 흥화진이 항복할 뜻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고, 이에 거란군은 병력을 절반으로 나누어 반은 잔류시키고, 나머지 반은 통주를 향해 내려갔다. 

     강조가 이끄는 주력부대가 자리 잡은 통주(通州)에서 고려군은 크게 패배했고, 강조는 사로잡혔다. 거란군은 강조의 편지를 위조하여 흥화진에 보내 항복하도록 설득했다. 하지만 양규는 이렇게 말하며 거부했다.

 

나는 왕의 명을 받고 온 것이지, 강조의 명을 받은 것이 아니오.
我受王命而來, 非受兆命.

 

 

     양규는 흥화진에서 군사 7백여 명을 이끌고 출발하여 함락되지 않았던 인근 통주로 가 군사 1천여 명을 추가하였으며, 밤중에 곽주로 들어가 기습을 감행하여 잔류한 거란 병사 6천을 모조리 죽인 후 성 안에 있던 고려 백성 7천여 명을 구출하여 통주로 옮겨 통주성의 방비를 강화했다. 이후로도 양규는 치열한 유격전을 펼쳤다.

 

     거란의 주력군이 남하하여 개경을 점령하고, 이후 강화가 맺어져 철군 길에 오른 시점에도 전투는 계속되었다. 1011년(현종 2년) 1월 거란군은 철수하며 고려인 포로 수만 명을 납치해 가며 청천강까지 올라갔는데, 1011년 1월 17일, 귀주에 주둔하고 있는 귀주 별장 김숙흥과 중랑장 보량이 이들을 습격해 거란군 만 명을 죽였다. 그리고 때맞춰 양규도 예비 병력 20만 명이 주둔하고 있었던 무로대(無老代)를 습격해 2천여 명의 목을 베고, 고려 백성 3천여 명을 구출해 냈다. 김숙흥은 귀주에서 흥화진 방향으로 거란군을 추격해 들어갔고, 양규는 흥화진에서 귀주로 가는 길을 따라가며 거란군 후미를 공략했다. 이수(梨樹)에서 전투를 벌이고, 석령(石嶺)까지 추격해 거란군 2500명을 베었고, 포로가 되었던 고려인 1000여 명을 구출하였다. 3일 뒤 여리참(余里站)에서는 거란군 1,000명을 죽이고 포로가 된 1,000명을 구출했다. 이렇게 연속해서 전투를 벌이며 거란군을 압박하다가 이윽고 김숙흥 부대와 합류했다.

 

     1011년 1월 28일, 양규와 김숙흥은 애전(艾田)에서 거란군의 선봉대를 습격하여 1,000여 명을 베었다. 그러나 얼마뒤 거란 성종이 직접 이끄는 거란군 본대가 나타나 양규 부대를 포위했다. 양규와 김숙흥은 거란 성종의 친위군을 맞아 화살이 다 떨어지고 병사들이 다 쓰러질 때까지 처절하게 싸웠고, 마침내 힘이 다해 양규와 김숙흥 이하 고려군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의의 및 평가

     양규는 원군도 없이 순월 사이에 7차례나 거란군을 기습해 적 6500여 명을 죽이고 포로가 된 백성 3만 명을 구출했으며 군마와 낙타, 병장기 등 헤아릴 수 없는 전리품을 노획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한 달 동안 일곱 번의 전투를 벌였다고 기록한다. 압도적인 수의 거란군이 주둔한 서북면 지역에서 은밀히 이동하며 거란군에 큰 타격을 입힌 양규와 김숙흥 등의 유격전의 성과는 매우 컸다. 양규를 비롯한 서북군의 피나는 분투는 400km에 달하는 길이의 보급로를 차단해 거란군이 고립되도록 하였고, 전쟁 초반에 통주에서 주력부대가 패배한 여파로 파죽지세의 기세인 거란군에게 개경을 잃은 고려가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주었다.   

     양규는 당대 고려의 지휘관 중에서도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특히 그의 야전에서의 활약은 현대의 특수전을 연상시키는데, 소수의 특공대를 이끌고 인질 구출 및 게릴라전을 하여 엄청난 전적을 세웠다. 동시에 홍화진 전투에서는 수성전, 곽주성에서는 공성전의 뛰어난 활약으로 다양한 종류의 전투에 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상훈

     양규는 거란 전쟁의 전공으로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추증되었고, 1019년(현종 10)에 공신녹권(功臣錄券)이 내려졌다. 1024년에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개국공신과 다름없는 공신이라는 의미)에 추봉 되었다. 문종(文宗 고려 11대) 때 신흥사 공신각(功臣閣)에 도형(圖形:초상화 봉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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