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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자세히 보기] 고려 거란 전쟁

고려 거란 전쟁 | 실제 역사 자세히 보기

 

고려 거란 전쟁은 993년(성종12년)부터 1019(현종 10년)에 이르기까지 26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거란이 고려를 침략한 전쟁을 가리킨다. 

 

썸네일 고려거란 전쟁
고려거란전쟁

 

고려 거란의 초기 관계

     고려 건국 초기에 거란은 현재의 몽골과 만주 지방에서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유목 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등장하여 여러 부족을 통일한 뒤 916년에 거란국을 건국했다. 이들은 국명으로 거란 혹은 요(遼)를 사용하였다. 거란은 926년에 발해를 멸망시키고 만주 지역을 통치하는 등 세력을 급속도로 확장하였고, 중국 대륙의 왕조들과 교류・갈등하며 북방의 강자가 되었다.

     고려 태조는 발해 유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한편 거란에 대해 '금수지국(禽獸之國)'이라 비판하고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며 북진 정책을 실행했다. 922년(태조 5년) 거란(요 태종)이 화친을 목적으로 낙타 50필과 사신 30명을 보내자 고려 태조는 사신 30인은 섬으로 유배하고 낙타는 만부교에서 굶겨 죽였다. 942년(태조 25년)에 고려는 거란과 단교를 선언하였고, 943년(태조 26년) 태조가 후세의 귀감으로 삼게 하라고 내린 열 가지 가르침인 훈요 십조에서 "거란은 금수의 나라이므로 풍속과 말이 다르니 의관제도를 본받지 말라." 하였고, "이웃에 강폭한 나라가 있으면 편안한 때에도 위급을 잊어서는 안 되며"라 하며 거란에 대한 적대적인 노선을 유지했다. 

     이후 고려 왕들도 태조의 대외 정책을 계승하여, 정종은 거란의 침입에 대비해 광군 30만명을 양성하였으며, 광종은 서북쪽 청천강 유역과 동북쪽 영흥 고원 등에 성을 쌓거나 군사시설을 만들었다.

     10세기 후반, 5대 10국의 혼란기가 끝나고 송(宋)이 중국을 통일(979년)함으로써 동북아시아의 국제 정세가 새롭게 형성되었다. 북방의 거란과 남방의 송이 직접 대립하는 상황이 형성되었는데, 특히 송은 과거 후진(後晋)이 군사적 원조를 받는 조건으로 거란에게 내주었던 '연운 16주'를 되찾으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986년(성종 5년)에 송은 거란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였으나 크게 패배하고 거란에 대해 수세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제1차 고려 거란 전쟁

 

배경

     거란은 동쪽 여진족을 정복하면서 점차 압록강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986년에 압록강 중류에 세워진 발해유민의 독립국가 정안국 (定安國)을 침략하여 멸망시키고 만주 전역을 장악했다. 결국 거란은 991년(성종 10년)에 압록강 하류에 군사기지를 설치하여 전략적 우세를 확보하고 고려에게 송과의 화친을 끊고 거란과 화친할 것을 요구했다.

 

 경과

     송을 제압하기 위해 후방의 안정이 필요했던 거란은 993년(성종成宗 12년) 10월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다. 당시 고려가 차지하고 있는 옛 고구려 땅을 내놓고 송과 교류를 끊을 것을 요구하였다. 고려 조정은 서희(徐熙)와 박양유(朴良柔) 등을 보내 국경 방어를 하도록 했고, 성종도 직접 안북부로 나가 전쟁을 지휘했다. 하지만 첫 전투에서 봉산군(蓬山郡)을 잃고 선봉장 윤서안이 사로잡히자 성종은 서경으로 돌아왔다. 

     청화사(請和使)로 간 이몽전(李蒙戩)이 돌아와 항복하라는 소손녕의 협박을 들은 고려 조정은 "임금께서 중신(重臣)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항복을 청해야 한다.'는 항복론과 '서경 이북의 땅을 거란에게 주고 황주(黃州)부터 절령(岊嶺)까지를 국경으로 삼는 것이 좋겠다.'는 할지론 등의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서희와 이지백 등이 항전을 강력히 주장하여 성종도 이를 따르기로 했다. 이후 안융진에서 대패한 소손녕이 화친을 제안하자 서희가 단신으로 요나라 진영에 가서 소손녕과 협상을 하였다. 

     서희가 당도하자 소손녕은 군신의 예를 요구하였다. 하지만 서희는 주저하지 않고 단호하게 거절하였고, 소손녕의 반복된 요구에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소손녕은 서희와 대등한 입장에서 예의를 지켜 앉았다.

 

소손녕이 서희에게 말하기를 

그대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 그대들이 침범해 왔다. 또 (고려는)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 바다를 넘어 송(宋)을 섬겼으므로 이제 군사를 이끌고 온 것이다. 만일 땅을 떼어서 바치고 통교한다면 무사할 것이다.

서희가 말하기를

아니다. 우리나라가 곧 고구려의 옛 땅이다. 그러므로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하였으니 만일 국토의 경계로 말한다면 상국(거란)의 동경(東京)은 전부 우리 지역 안에 있는데 어찌 영토를 침범한 것이라 하는가? 그리고 압록강의 안팎 또한 우리의 지역인데 지금 여진(女眞)이 그 사이에 도둑질하여 차지하고는 교활하게 대처하고 있어 길의 막힘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심하니 조빙의 불통은 여진 때문이다. 만일 여진을 내쫓고 우리 옛 땅을 되찾아 성과 요새를 쌓고 도로를 만들면 어찌 교빙하지 않겠는가? 장군이 만일 신의 말을 천자에게 전하면 어찌 가엾이 여겨 흔쾌히 받아들이지 아겠는가?


 결과 _ 강동 6주 획득

     서희와 소손녕의 회담이 타결되면서 거란은 물러가고 고려는 송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거란과 교류하기로 약속하였다. 그 대가로 고려는 압록강 일대의 흥화진(興化鎭), 통주(通州), 구주(龜州), 곽주(郭州), 용주(龍州), 철주(鐵州) 등의 이른바 강동 6주를 획득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결국 제1차 고려 거란 전쟁은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대신에 요와 교류를 증진시키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기에, 요는 사대의 예를 받게 됨으로 침략의 목적을 달성하였고, 고려는 강동 6주를 회득함으로 실리를 확보하게 되었다. 하지만 고려는 송나라와 비공식적으로 교류를 지속하였고, 요 역시 강동 6주가 여진 정벌과 고려 압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임을 알고 재침략의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제2차 고려 거란 전쟁

 

 배경

     제1차 고려 거란 전쟁 이후 고려와 거란은 비교적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긴장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거란은 계속해서 송을 압박했고 1004년에는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거란 황제 성종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친정에 나서 송군을 격파하고 수도인 개봉(開封) 인근 전연(澶淵)까지 진격하였다. 그곳에서 '전연의 맹약'이라는 화의를 맺었고, 그 결과 송은 거란에 매년 막대한 양의 은과 비단을 보내야 했으며, 송의 황제는 거란의 황태후를 숙모로 대우하기로 했다. 이렇게 송을 제압한 거란은 고려에 대한 압박을 가할 가능성이 있었으나 일단 원만한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기에 전쟁의 명분이 없었다.

     그러던 중 고려에서 1009년(목종 12년)에 이른바 '강조의 정변(康兆-政變)'이 발생했다. 젊고 후사가 없었던 제7대 목종(穆宗)이 병이 들면서 후계자 선정이 문제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강조가 목종을 폐위하고 대량원군 왕순(현종顯宗)을 옹립한 뒤 조정을 장악했다. 이를 구실로 거란 황제 성종이 대역죄인 강조를 처벌하겠다는 구실을 내세우며 고려 침공을 지시했다. 

 

전개

     1010년(현종顯宗 원년) 11월, 거란의 성종은 직접 40만 군대를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다. 거란이 고려를 침공한 진짜 의도는 고려와 송의 교류를 완전히 차단하여 고려와 거란간의 관계를 다시 확인시키고 강동 6주를 되찾으려는 데 있었다.

     첫 번째 전투는 흥화진(興化鎭)에서 벌어졌는데 성주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은 수차례에 걸친 거란의 거센 공격을 방어했다. 거란군은 병력을 절반으로 나누어 반은 잔류시키고 나머지 반은 개경을 향해 진군했다. 전략의 요충지인 통주(通州)에서 강조가 지휘하는 30만 군이 거란군과의 전투에서 대패했고, 통주성은 다행히 함락되지 않았으나 강조를 포함판 다수의 장수들이 죽거나 사로잡혔고 병력도 큰 타격을 입어 흩어졌다. 

     고려 현종은 훗날을 기약하라는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개경을 버리고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이 피난길에서 현종은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거란군에게 점령된 개경도 크게 파괴되었다.

 

결과

     결국 현종은 친조(親朝), 즉 국왕이 직접 거란 조정에 들어가 황제를 만난다는 조건으로 강화를 청하였고, 이를 받아들인 거란 성종은 군대를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거란군이 철수하자 성을 지키던 양규, 김숙흥을 비롯한 후방의 고려군이 곳곳에서 퇴각하는 거란군을 공격해서 사로잡힌 3만이 넘는 포로를 구출하고, 끝까지 거란군에 대해 공격을 가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양규와 김숙흥이 전투 도중 전사하였다.

 

 

 


 

 

 

제3차 고려 거란 전쟁

 

 배경

     1011년 개경으로 돌아온 현종은 병을 핑계로 친조를 하지 않았고, 이미 고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충지가 된 강동 6주 반환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다. 1013년 거란과 국교를 끊고 이듬 해에 송과 다시 교류를 시작했다. 거란은 무력으로 이 지역을 빼앗으려고 여러 차례에 걸쳐 공격을 하였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자 거란 성종은 다시 한번 대대적인 고려 공격을 준비했다. 

 

전개

   

     1018년(현종 9년) 12월 거란은 소배압(蕭排押)이 지휘하는 10만 병력을 동원하여 다시 고려를 침공했다. 거란군의 대대적인 침공에 대해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던 고려는 상원수에 강감찬, 부원수에 강민첨을 임명하고 약 20만 8천의 병력을 소집하여 전선으로 투입했다. 

     공략이 어려운 홍화진을 우회하여 개경으로 향하던 거란군의 길목을 지키던 고려군은 삼교천(三橋川)에서 매복하고 소가죽으로 물길을 막아두었다가 적군이 다가올 때 막았던 물을 터뜨려 적군을 혼란에 빠뜨려 크게 격파하였다. 

     초기에 큰 손실을 입은 거란군은 고려군의 계속된 공격에도 불구하고 개경으로 진군하다가 자주 내구산에서 추격전을 벌인 강민첨 대장군의 기병 1만 4천 명에게 대패하고, 대동강 가의 마탄에서는 시랑 조원을 만나 1만 명의 군사를 잃었다. 고려군은 군수물자나 식량이 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일부러 모두 없애버려 상대로 하여금 보급이 어렵게 만드는 청야 전술을 펼쳐 거란군의 보급에 큰 어려움을 겪도록 했다. 소배압은 이듬해 정월 개경에서 멀지 않은 신은현에 도착했으나 또 다시 고려군의 청야 작전에 당했고, 척후로 보냈던 기병 3백이 금교역에서 고려군에게 전멸당했다. 또한 개경의 방어가 철저하다는 첩보에 개경을 함락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결국 철군을 결정하였다. 

     강감찬은 패퇴하는 거란군을 귀주에서 기다렸고 김종현의 철기 기마부대, 강민첨의 기병과 함께 완전 포위 작전으로 거란군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이것이 귀주대첩(1019년)이다. 당시 압록강을 건너 돌아간 거란군이 수천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결과

     1019년 전쟁은 끝이 났고, 이후 고려와 거란(요) 사이에 국교가 회복되었다. 고려는 요의 제안을 수용하여 송의 연호를 중지하고 요의 연호를 사용하는 대신 요가 요구한 친조와 강동 6주를 반환하지 않기로 했다. 고려는 요와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위해 홍화진 북쪽의 압록강 어귀에서부터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과 개경 수비를 위해 나성을 쌓았다. 

     거란의 거듭된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고려는 한층 높아진 국제적 위상을 가질 수 있었다. 요는 고려 침략에 실패하면서 요동에서의 지배권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고려로 인해 송을 쳐들어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하여 고려-송-요 3국 간의 대등한 세력 균형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국제 정세의 재편 속에서 고려는 거란 및 송과 활발한 교류를 펼치며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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