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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고려의 후삼국 통일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통치체제를 정비하다

 

경상북도 안동에서는 매해 정월 대보름에 차전놀이가 벌어진다. 차전놀이는 나무를 교차하여 만든 기구에 대장이 올라타 상대를 밀어내면 승리하는 놀이이다. 이 놀이는 지금의 안동 지역에서 벌어진 고려와 후백제의 전투에서 유래하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고려 왕건은 안동 호족들의 도움으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를 기념하면서 차전놀이가 전승되었다고 한다. 

 

썸네일 고려의 통일
고려의 통일

 

후삼국의 분열과 고려의 통일

     궁예는 북방 지역 호족들의 지원으로 송앙(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후고구려를 세웠다(901). 송악의 호족인 왕건은 궁예의 부하가 되어 후백제의 금성(나주)을 점령하는 등 공을 세웠다. 후고구려의 궁예는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고, 국호를 태봉으로 바꾸었다. 궁예는 왕권을 강화하고자 호족을 탄압하고 자신을 미륵이라 칭하여 불교계의 반발을 샀다. 호족 세력은 이러한 궁예의 정책에 반발하여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였다(918). 왕건은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로 정한 뒤 이듬해 송악(개성)으로 수도를 옮겼다. 

     고려 건국 직후에는 후백제가 고려보다 우세하였다. 궁예 지지 세력이 반란을 꾀하였고, 옛 백제 지역의 호족들도 고려에 협조하지 않았다. 이에 태조는 겸손한 태도로 호족을 대하고 호족의 딸과 혼인하여 호족 세력을 포섭하였다. 또한 신라에 우호적인 정책을 펼쳐 신라의 지지를 얻었다. 그 결과 고려는 점차 후백제와의 대결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다. 후백제에서 왕위 다툼이 일어나 견훤이 귀순해 오자 고려는 후백제 정벌을 준비하였다. 935년 신라의 경순왕도 더 이상 나라를 유지할 수 없다고 여겨 항복해 와 전쟁 없이 신라를 통합하였다. 936년에 고려군은 마침내 후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또한, 거란에 멸망한 발해 유민도 적극적으로 포용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고려는 후삼국을 비롯하여 발해 유민까지 포함한 민족의 재통합을 이루었다. 

 

 

 

 

왕권 강화와 체제 안정을 위한 노력

      태조는 호족을 통합하고, 민생을 안정시켜 국가의 기틀을 다지려 하였다. 유력한 호족 가문과 혼인을 하거나 성씨를 하사하는 등 호족을 우대하는 한편, 사심관 제도기인 제도를 실시하여 호족을 통제하고 지방 통치를 보완하였다. 민생 안정을 위해 백성의 조세 부담을 줄이고 빈민 구제 기관인 흑창을 설치하였으며, 후대 왕에게는 훈요 10조를 남겨 통치의 교훈으로 삼게 하였다. 

     대외적으로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바탕으로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서경으로 삼아 중시하고, 북쪽으로 영토를 넓혀 청천강 유역까지 진출하였다. 그리고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적대하였다. 

 

 

 

 

왕권 강화

     태조가 죽은 뒤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외척 세력 사이에 치열한 다툼이 일어났다. 불안정한 정치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광종은 호족과 외척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시행하여 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사람을 해방하였다. 그 결과 양인의 수가 늘어나 국가 재정 기반이 확충되었고, 공신과 호족의 경제・군사적 기반은 약화되었다. 과거제를 실시하여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리를 등용하여 왕권을 뒷받침하게 하였으며, 공복을 제정하여 관리의 위계를 세웠다. 그리고 수많은 공신과 호족 세력을 숙청하였다. 또한, 황제의 칭호와 '광덕', '준풍' 등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고, 개경을 '황도'로 칭하는 등 고려가 황제국임을 드러내 왕의 권위를 높였다. 뒤를 이은 경종은 전시과를 실시하여 호족과 공신들의 경제 기반을 안정시켰다. 

 

 

 

 

 유교 통치이념

     성종은 즉위 후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유교 정치 이념을 바탕으로 중앙과 지방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중앙 통치 기구는 기존의 제도를 바탕으로 당의 제도를 참조하여 2성 6부로 정비하였으며, 지방에는 12목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또한, 중앙의 국자감을 정비하고, 지방에는 경학박사를 파견하고, 국가 행사에 유교 의례를 도입하는 등 유학 교육을 장려하였다. 현종은 즉위 이후 성종 때 폐지된 팔관회를 다시 개최하였다. 

 

 

 

 

통치 체제의 구조와 운영

     고려는 당의 3성 6부제를 나라의 실정에 맞게 받아들여 중서문하성과 상서성, 6부를 중심으로 중앙 정치 체제를 운영하였다. 중서 문하성이 국정을 총괄하였고, 상서성이 6부를 관리하며 정책을 집행하였다. 왕은 비서 기구인 중추원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정책에 반영하였다. 이 밖에도 감찰 기구인 어사대, 화폐와 곡식 출납을 담당하는 삼사가 있었다. 

     중서문하성의 재신과 중추원의 추신은 고려만의 독자적인 정치 기구인 도병마사식목도감에서 회의를 열어 정책을 결정하였고, 중요한 안건은 회의 참여 인원을 늘려 다수에게 의견을 물었다. 재신과 추신은 6부를 비롯한 관부이 장관을 겸하며 정책의 결정과 집행에 관여하였다. 그리고 대간을 두어 왕과 관리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관리의 임명과 해임에 동의할 수 있는 서경권을 갖도록 하여 권력의 견제와 균형을 꾀하였다. 

    고려 초기에는 호족의 세력이 강하여 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강하지 못하였다. 중앙에서는 지방에 사신을 보내 세금을 거두었고, 중앙 관리를 출신 지역의 사심관으로 임명하여 지방을 통제하였다. 성종때 처음으로 12목을 설치하여 지방관을 파견하였고, 향리제를 정비하여 호족을 향리로 삼았다. 현종 때는 전국을 5도 양계로 나누고, 그 밑에 군현과 진을 설치하였다. 일반 행정 구역인 5도에는 안찰사를 파견하여 행정을 살폈고, 도 아래에는 주・군・현을 두었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에는 부계와 동계를 두어 병마사를 파견하고, 국방상의 요충지에는 진을 설치하였다. 이밖에 수도 주변에 설치한 경기와 풍수지리설에 따라 설치한 3경이 있었다.

    군현에는 지방관이 파견된 주현과 파견되지 않은 속현이 있었으며, 주현보다 속현의 수가 많았다. 중요한 주현은 계수관이 되어 몇 개의 주현을 통솔하며 중앙의 명령을 집행하였다. 특수 행정 구역으로 향・부곡・소 등이 있었다. 속현과 특수 행정 구역은 주현에 파견된 지방관이 향리의 도움을 받아 다스렸다. 

 

 

 

 

다양한 방식으로 관리 등용

     고려는 과거와 음서 등으로 관리를 선발하였다. 과거는 문신을 선발하는 문과를 중심으로 시행되었으며 제술, 승려에게 승계를 내려 주는 승과, 기술관을 뽑는 잡과가 있었고, 무과는 거의 실시되지 않았다. 

     음서는 종실이나 공신, 고위 관리의 자손에게 관직을 내려 주는 제도였다. 또한, 학식과 덕행이 뛰어난 인물을 특별히 추천하여 관리로 삼는 천거도 있었다. 고려는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관리를 등용하여 고대 사회의 폐쇄성을 극복하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