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의 종교와 사상_불교
신라 법흥왕 때 이차돈은 불교를 공인하기 위해 순교하였다. 그는 귀족들이 전통적인 신앙지로 여겼던 숲에 절을 세운 죄로 죽임을 당하였다. 이차돈은 목이 잘리는 그 순간에도 불교가 번성하기를 기원하였는데, 그의 목을 자르자 흰 피가 솟구치고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이차돈의 순교는 신라에서 불교를 공인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천손 의식을 내세우는 삼국의 왕실
초기의 삼국은 천신 신앙을 바탕으로 건국의 정당성을 밝히고 왕권 강화와 왕권 안정을 꾀하여 국가를 통합하려 하였다. 삼국의 왕실은 시조를 하늘과 연결하여 천신의 자손임을 자처하고, 시조를 모시는 사당을 세우고 국가 차원의 제천 행사를 주도하여 권위를 과시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압록강 유역의 졸본에 시조인 추모왕(주몽)의 사당을 세웠고, 매년 10월에 동맹이라는 제천 행사를 개최하였다. 백제는 온조왕 때 부여의 시조인 동명왕을 모시는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고, 신라도 시조인 박혁거세를 모시는 사당을 만들어 국왕이 직접 제사를 지내면서 자신들이 하늘의 후손임을 강조하고 제사 의례를 통해 연맹체를 통합하였다.
한편, 삼국은 영토를 넓히고 통치 제도를 정비하는 등 중앙 집권적 국가로 발전하는 가운데 왕위의 계보를 정리하여 왕실의 정통성을 확립하였다. 이때 왕실의 시조가 천신의 자손이라는 의식을 내세우며 정통성을 강조하였고 대외적으로 중국과 대등하다는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5세기경에 건립된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릉비에는 추모왕의 건국 이야기와 함께 광개토 대왕이 온 세상에 권위를 떨쳤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광개토 대왕이 '대왕', '태왕' 등으로 불렸고, 이 시기 '영락'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고구려는 독자적인 천하관을 내세우며 자국 중심의 국제 질서를 형성하였다.
삼국의 불교 수용
삼국의 왕실은 천신 신앙으로 자신들의 권위를 높였으나 삼국 초기에는 연맹체를 구성하는 각 부도 나름의 시조신을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건국 신화로 국가를 통합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삼국은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해 가는 과정에서 백성을 통합할 수 있는 새로운 종교가 필요하였다. 이 시기에 중국에서 불교가 전해졌다. 고구려는 소구림왕 때 전진에서, 백제는 침류왕 때 동진에서 불교를 수용하였으며, 신라는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하였다.
삼국의 왕실은 불교 사찰을 세우고, 불교 행사를 성대하게 열어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다. 불교의 전륜성왕을 왕과 연결시켰고, 신라에서 불교식 왕명을 사용하여 왕실과 부처의 집안을 동일시하였다. 이에 불교는 왕권을 이념으로 뒷받침 하고, 지배층의 통치를 합리화하는 종교로 자리를 잡았으며, 천신 신앙, 산신 신앙 등 기존의 토착 신앙과 융합되면서 점차 확산되었다.
삼국 시대의 불교는 국가의 안녕과 발전을 비는 호국 불교의 성격을 띠었다. 고구려는 평양에 9개의 사찰을 건립하였고, 백제는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신라는 황룡사와 문황사를 세우는 등 호국적인 성격의 대규모 사찰을 지였다. 신라 선덕 여왕은 불교를 통해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고, 원광은 세속 5계를 지어 젊은이들을 가르쳤다. 또한 삼국의 왕실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불교 행사를 열어 사회 통합을 꾀하였다.
통일 신라의 불교 대중화
삼국 통일을 전후하여 신라의 불교는 당에서 유학한 승려들이 활동하면서 교리에 대한 학문적 철학적 이해가 깊어졌다. 또한 원효와 의상 등의 활약으로 불교의 대중화가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보다 많은 사람이 불교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원효는 '모든 것이 한마음에서 나온다'는 일심 사상을 내세워 불교 교리에 대한 이해를 깊이하는 한편, 여러 종파의 대립을 없애고자 화쟁 사상을 주장하였다. 더불어 '나무아미타불'만 암송하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가르쳐 하층민들도 불교를 친숙하게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당에 유학한 의상은 '모든 것이 서로 연관되어 조화를 이룬다.'라는 화엄 사상을 바탕으로 해동 화엄종을 열었으며 「화엄일승법계도」로 교리를 체계화하였다. 부석사를 비롯한 여러 사 찰을 건립하여 제자를 키웠고, 관음 신앙을 전파하였다.
이 외에도 여러 승려들이 신라 불교의 위상을 높였다. 원측은 당에 건너가 법상종의 발전에 기여하였고, 혜초는 중앙아시아와 인도 지역의 다섯 천축국을 순례하고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신라 말 선종의 유행
신라 말 유행한 선종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무렵에 처음 전래되었다. 경전과 교리를 중시하는 교종과 달리 참선 수행을 통한 개인의 깨달음을 중시하는 실천적 경향이 강하였다. 선종은 도입 초기에는 신라 왕실의 지원을 받았으나, 참선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교리가 지방에서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던 호족들의 취향에 부합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선종은 신라 말 호족을 사상적으로 지원하기도 하였으며, 호족의 후원 아래 선종은 9산선문으로 대표되는 사찰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선종은 지방 문화의 발달에 영향을 주었고, 새로운 사회 건설에 필요한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발해의 불교 발달
발해에서는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불교가 유행하면서 수도 상경성을 비롯한 주요 지역에 많은 사찰을 건립하였다. 발해 역시 삼국과 마찬가지로 불교를 통해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 하였다. 문왕을 높여 부른 칭호인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에는 ‘금륜’과 ‘성법’ 등 불교의 전륜성왕 관념이 반영되어 있다. 또한 문왕의 딸인 정효 공주 묘는 무덤 위에 탑을 쌓고 그 주변에 절을 세워 공주의 묘를 지키게 하였다.
발해는 고구려 불교를 이어받고 당의 문화를 수용하면서 불교문화를 발전시켰다. 발해의 석등과 이불 병좌상 등에서 발해 불교가 고구려 불교의 영향을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발해와 당이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발해의 승려들이 당에 유학하여 불교 교리를 심화하였다. 이들은 일본과의 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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