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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중앙 집권적 고대 국가의 발전

삼국이 중앙 집권적 고대 국가로 발전하다

 

194년, 고구려의 고국천왕은 일종의 빈민 구제 제도인 진대법을 실시하였다. 봄에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가을에 갚도록 하는 진대법은 농민들의 빈곤을 덜어주면서 동시에 농민들이 귀족에게 예속되는 것을 막았다. 이를 통해 고국천왕은 민생 안정을 꾀하고, 귀족 세력의 확장을 억제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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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집권적 고대 국가의 발전

 

삼국과 가야가 건국되다

     부여에서 내려온 주몽은 압록강 유역의 토착민과 연합하여 졸본 지역에서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산간 지대에 위치한 고구려는 주변 소국을 정복하며 평야지대로 진출하였다. 이후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긴 고구려는 5부 연맹을 토대로 성장하였고, 각 부는 각자의 주민과 영역을 다스렸다. 지배층으로 왕과 여러 가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각각 사자・조의・선인 등의 관리를 거느렸다. 태조왕 때에는 옥저를 복속하고 한 군현을 공격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고국천왕 대부터 5부를 방위를 나타내는 명칭으로 개편하여 행정적 성격을 강화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미천왕 때에는 낙랑을 공격하여 대동강 유역을 확보하였다. 

     고구려계 유민인 온조는 부여와 고구려에서 내려온 이주민과 한강 유역의 토착 세력과 함께 백제를 세웠다. 하남 위례성을 수도로 삼은 후 마한의 소국들을 제압하며 성장하였다.

     마한의 여러 소국 중 하나였던 사로국이 신라로 발전하였다. 신라는 경주 일대의 6부 연맹에 기초하여 진한의 소국들을 복속시켰다. 신라는 초기에는 박・석・김 씨가 돌아가며 왕위에 올랐고 왕호도 거서간, 차차웅에 이어 이사금을 칭하는 등 왕의 위상이 그다지 높지 않았다. 내물왕 때 김 씨의 왕위 세습이 확립되었다.

     한편 낙동강 하류의 변한 지역에서는 여러 소국이 가야 연맹을 이루었고 3세기 경에는 김해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연맹을 이루어 발전하였다. 금관가야는 5세기경 신라를 지원한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쇠퇴하였고, 이후 고령의 대가야가 연맹을 이끌었다. 가야 연맹은 풍부한 철을 바탕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각 소국이 독자적인 권력을 유지하여 지배력을 한데 모으지 못하였고, 백제와 신라의 압력으로 중앙 집권 국가로 성장하지 못하였다. 

     삼국 초기에는 여러 부가 모여 구성한 연맹체였다. 가장 강력한 부의 대표가 왕이 되어 외교권과 군사권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각각의 부는 왕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지 않고 자치적으로 부를 운영하였다. 전쟁이나 중대한 범죄자의 처벌 등의 국가 중대사는 왕과 부의 대표들이 합의하여 결정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고구려의 제가 회의, 백제의 정사암 회의, 신라의 화백 회의와 같은 삼국의 회의체가 운영된 방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중앙 집권직 지배 체제를 갖추다

     삼국은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치며 영토를 넓혀 나갔다. 이를 주도한 왕과 왕이 속한 부의 권력이 강화되어 삼국은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적 지배 체제를 갖춰 나갔다. 한편 국정 운영에서 밀려나가는 부가 생기면서 각 부 사이에 세력의 차이가 생김에 따라 힘이 점차 약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삼국의 왕들은 왕위 계승의 안정을 꾀하였다. 삼국은 자치적 성격의 부를 행정적 단위로 재편하였으며, 각 부의 지배자는 중앙 귀족으로 편입시켰다. 이 과정에서 각 부에 속한 관리도 왕을 정점으로 하는 관등제에 편입되었다. 관등제는 신라의 골품제와 같은 신분제와 연계하여 운영되어 각 신분별로 올라갈 수 있는 관등에 제한을 두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는 1세기 초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세력을 넓혔다. 1세기 후반 태조왕을 옥저를 정복하였고, 랴오둥 지역으로 진출을 꾀하였다. 2세기경 고국천왕은 농민층의 경제적 몰락을 막고자 진대법을 실시하였고, 4세기경 미천왕은 낙랑군을 몰아냈다. 

     백제는 3세기경 고이왕이 마한의 소국들을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장악하였다. 4세기 중엽 근초고왕은 왕위 계승을 안정시켰다. 또한 마한의 남은 세력을 복속하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며, 중국의 동진과 교역하고 왜와 교류하였다. 

     신라는 3~4세기에 진한 소국들을 대부분 복속하였다. 4세기 후반 내물왕 때에는 김 씨의 왕위 계승이 확립되었고, 왕호도 마립간으로 바뀌었다. 

     삼국은 중앙 집권적 지배 체제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율령을 반포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 신라는 법흥왕 때 율령을 반포하였으며 백제 역시 율령을 반포하였다. 또한, 삼국의 왕실은 불교를 수용하여 왕권을 뒷받침하였다. 

 

 

 

 

백제가 먼저 삼국 항쟁의 주도권을 잡다

     백제는 3세기 중엽 고이왕 때 목지국을 병합하여 한강 유역 대부분을 차지하였으며, 관료등제를 정비하고 관리의 복색을 정하고 법령을 정비하는 등 중앙 집권적 지배 체제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를 토대로 4세기 중엽에 근초고왕은 마한의 남은 세력을 정복하여 남해안까지 진출하였으며, 고구려를 공격하여 황해도 일대를 차지하는 등 최대 영토를 확보하고 전성기를 누렸다. 또한, 중국의 동진, 왜와 교류하였다. 그러나 5세기 후반 고구려의 공격으로 한성이 함락되면서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웅진(공주)으로 수도를 옮기는 등 위기에 처하였다. 백제는 6세기에 들어 무령왕의 노력으로 중흥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어 성왕은 사비(부여)로 수도를 옮기고, 신라와 연합하여 한강 하류 지역을 회복하고, 중앙 관청을 22부로 설치하는 등 정치 기구를 정비하였다. 그러나 한강 하류 지역은 곧 신라에 빼앗겼고, 성왕도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고구려가 동아시아 강국으로 우뚝 서다

     고구려는 4세기 후반 소수림왕이 태학을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였다. 또한 율령을 반포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기준과 국가 기구제도를 마련하였다. 이어 4세기말에 즉위한 광개토 대왕은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랴오둥을 비롯한 만주 지역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편,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이북을 차지하였다. 또한, 군대를 보내 신라에 침입한 왜를 물리쳤다.

     광개토 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은 중국의 남북조와 교류하여 국제 관계를 안정시키는 한편, 남진 정책을 펼쳐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장악하였다.  이 시기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성장한 고구려는 천하의 중심임을 표방하였다.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다

     신라는 6세기에 통치 체제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간추어 나가는 한편, 영토를 확장하였다. 지증왕은 왕호를 중국식인 '왕'으로 바꾸었고, 나라 이름도 '신라'로 정하였으며, 우산국을 정복하였다. 법흥왕 때 율령을 반포하였으며 병부를 설치하여 군사권을 왕에게 집중하였다. 또한 관리의 공복을 제정하였으며, 상대등을 설치하여 국정을 총괄하는 재상의 역할을 부여하였다. 또한 불교를 공인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였고 연호를 사용하고, 금관가야를 병합하였다. 

     6세기 중반 진흥왕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화랑도를 국가적 조직으로 개편하였다. 그리고 백제와 연합하여 한강 상류 지역을 차지하고, 이후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 지역도 손에 넣어 한강 유역을 모두 장악하고, 고령의 대가야를 병합하였으며, 북쪽으로 함흥평야까지 진출하였다. 진흥왕은 점령지에 단양 신라 적성비와 순수비 등을 세워 영토 확장을 기념하였다. 

 

 

 

 

관등제와 지방 통치 체제 정비

     삼국은 중앙 집권적 고대 국가로 성장하면서 관등제를 확립하고 관료 체제를 정비하였다. 백제는 고이왕 때 6좌평을 비롯한 관등과 공복을 마련하여 위계질서를 세웠다. 고구려는 3세기 후반에 5부 연맹이 해체되면서 지배 세력을 관등에 편입시켜 서열화하였다. 신라는 6세기 법흥왕 때 17 관등제를 정비하였다. 신라에서는 지방의 부족장 세력이 중앙 귀족으로 포섭되는 과정에서 자신이 속한 부의 세력에 따라 지위를 받으면서 골품제라는 신분 제도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골품제가 관등제와 결합하면서 골품에 따라 승진할 수 있는 등급이 정해졌다. 

     삼국은 관등제를 정비해 각 부의 지배 세력을 중앙 귀족으로 만들어 국왕 중심의 위계질서를 확립하였다. 왕과 부의 대표들이 모여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던 회의는 귀족 회의로 성격이 바뀌었다. 왕이 귀족 회의를 주재하는 관리를 임명하였고,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은 왕에게 재가를 받게 하였다. 백제에서는 상좌평, 고구려는 대대로, 신라에서는 상대등이 중심이 되어 회의를 주재하였다.

     한편, 삼국이 중앙 집권적 고대 국가로 나아가면서 각 부들은 더 이상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왕은 정복 전쟁으로 넓힌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전국을 행정 구역으로 편재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다스리는 지방 통치 체제를 마련하였다. 백제는 무령왕 때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하였으며, 성왕 때에는 전국을 5개의 방으로 나누었다. 고구려는 성을 중심으로 행정 구역을 나누었다.  신라는 6세기경 전국을 주・군으로 나누고 그 아래에 촌을 두는 지방 행정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를 통해 지방에 대한 중앙 정부의 지배력을 강화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