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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발해가 건국되다

발해가 건국되고 해동성국으로 발전하다

 

발해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분명히 하였다.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서 발해왕은 스스로 고려(고구려) 왕이라 하였고, 일본에서도 발해를 고려(고구려)라고 불렀다. 또한 유물・유적에서도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썸네일 발해가 건국되다
발해가 건국되다

 

발해의 성장과 멸망

     고구려 멸망 이후 당은 고구려 옛 땅을 지배하고 고구려 유민 중 많은 수를 요서 지역으로 강제로 이주시켜 지배하였다. 7세기말에 요서 지역에서 거란이 봉기하여 당의 지배력이 약화되자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이끌고 동모산 근처에서 발해를 세웠다(698).

     대조영은 고구려 계승 의식을 내세워 옛 고구려의 영토에 자리 잡고 세력을 확대하였다. 뒤를 이은 무왕은 인안이라는 연호를 정하여 국가의 위상을 높였으며, 적극적으로 영토 확장에 나섰다. 당과 신라를 견제하였고, 발해의 성장에 위기를 느낀 당이 압박해 오자, 발해는 당의 산둥 지방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어 즉위한 문왕은 당과 친선 관계를 맺고 대외적인 안정을 꾀하였으며 당의 문물과 제도를 수용하여 체제를 정비하였다. 문왕은 대흥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국내에서는 '대왕', '황상'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이 시기 당의 장안성을 본떠 새로운 수도인 상경성을 건설하였다. 

     발해는 9세기 초 선왕 때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이 시기에 서쪽으로는 랴오허강, 동북쪽으로는 헤이룽강까지 영역을 확대하여 최대 영토를 확보한 발해는 이후 '해동성국'으로 불렸다. 하지만 발해는 9세기말 이후 동아시아의 정세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여 국력이 쇠퇴하였고, 거란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926).

 

 

 

 

발해의 통치 체제 정비

     발해는 건국 초기에는 고구려의 제도를 바탕으로 중앙 정치를 운영하였다. 왕을 중심으로 중앙 집권적인 통치 체제를 갖추었고, 이후 문왕 때 당의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여 3성 6부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 통치 제도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명칭과 운영 방식에서 독자성을 보였다. 왕 아래 정당성의 장관인 대내상이 국정을 총괄하였고, 선조성, 중대성을 두었다. 정당성 아래 6부를 둘로 나누어 관할하게 하였는데, 좌사정이 충・인・의 3부를, 우사정이 지・예・신 3부를 각각 나누어 관할하는 이원적인 통치 체제를 구성하였고, 6부의 명칭은 유교 이념을 반영하였다. 

     지방은 5경 15부 62주로 정비하였다. 전략적 요충지에는 5경을 두었고, 지방 행정 중심지나 교통의 중심지에 15부와 62주를 두고 도독과 자사 등의 지방관을 파견하여 다스렸다. 발해는 정복한 지역의 주민을 지배 체제에 편입시키기 위해 촌락의 우두머리인 수령을 중앙 지배층으로 받아들이거나 수령에게 촌락의 행정을 맡겼다. 

     발해의 군사 조직은 중앙군으로 10위를 두어 왕궁과 수도의 경비를 맡겼고, 지방 행정 조직에 따라 지방군을 편성하여 지방관이 지휘하게 하였다. 국경의 요충지에는 따로 독립된 부대를 두어 방어하기도 하였다. 

 

 

 

 

후삼국으로 분열

     10세로 들어오면서 지방에서 성장하던 견훤과 궁예는 신라가 혼란한 틈을 타 독자적 세력을 모아 나라를 세우면서 후 삼국 시대가 열렸다. 

     견훤은 전라도 지방의 군사력과 호족 세력을 토대로 완산주(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웠다(900). 후백제는 차령산맥 이남의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을 차지하여, 그 지역의 우세한 경제력을 토대로 군사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또,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는 등 국제적 감각도 갖추었다. 그러나 견훤은 신라에 적대적이었고, 농민에게 지나치게 조세를 수취하였으며, 호족을 포섭하는 데 실패하는 등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궁예는 신라 왕족의 후예로서, 처음에는 북원(원주) 지방의 도적 집단을 바탕으로 성장하여 강원도, 경기도 일대의 중부 지방을 점령하였다. 이어서 예성강 유역의 황해도 지역까지 세력을 넓혔다. 그는 세력이 커지자 송악(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후고구려를 세웠다(901). 이후 궁예는 영토를 확장하고 국가 기반을 다져, 나라 이름을 마진이라 하였다. 그리고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다시 태봉으로 고치고 새로운 정치를 추구하였다. 

     궁예는 새로운 관제를 마련하고 골품 제도를 대신할 새로운 신분 제도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궁예는 계속되는 전쟁을 치르려고 지나치게 조세를 거두어들였고, 죄 없는 관료와 장군을 살해하였을 뿐 아니라, 미륵 신앙을 이용하여 전제 정치를 도모하였다. 이에 따라 백성과 신하들의 신망을 잃어 신하들에 의하여 축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