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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신라의 삼국 통일

통일 신라가 지방 통제력을 강화하다

 

통일을 이룬 신라는 확대된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수도의 구조를 정비하였다. 금성이라 부르던 왕경의 호칭을 금경, 대경이라 높여 불러 지방과 구분을 도입하였고, 궁성을 확장하여 왕실의 위상을 높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9세기말 경주에는 178,936호, 1,360방, 55리, 35개의 금입택(부유한 근 저택)이 있었다고 한다. 

 

썸네일 신라의 삼국 통일
신라의 삼국 통일

 

신라, 삼국을 통일하다

     6세기 후반에 분열된 중국이 통일되면서 동아시아 정세에는 큰 변화가 나타났다. 동아시아에서는 돌궐, 고구려, 백제, 왜로 이어지는 세력과 신라와 수・당을 연결하는 세력이 대립하였다. 중국을 통일한 수・당은 동아시아 패권을 장악하려 여러 차례 고구려를 공격하자 고구려는 맞서 싸워 중국의 침공을 막아냈다. 

     고구려가 당과 대립하는 사이 신라는 백제의 공격으로 어려움에 처했다. 신라는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자 당과 나당 동맹을 맺었다. 7세기 중반 나당 연합군은 백제를 공격하여 사비성을 함락하고(660), 권력 다툼으로 혼란한 틈을 타 고구려를 공격하여 평양성을 함락하였다(668).

     당은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에 각각 웅진도독부와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신라에는 계림대도독부를 두어 한반도를 장악하려 하였다. 이에 신라는 매소성과 기벌포에서 당군을 물리치고 삼국 통일을 이룩하였다(676). 

     신라의 삼국 통일 과정에서 진골 출신인 태종 무열왕이 즉위하였고, 이후 무열왕의 직계 자손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통일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무열왕과 문무왕은 내부적으로 왕권을 강화하면서 왕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문무왕의 뒤를 이은 신문왕은 김흠돌의 난을 집압을 계기로 진골 귀족들을 숙청하여 왕권을 견고히 하였다. 

 

 

 

 

통일 신라, 통치 체제를 정비하다

중앙 통치 체제 개편

     통일 신라는 넓어진 영토와 늘어난 인구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여러 제도를 정비하였다. 중앙 정치 조직은 강력한 왕권 아래 관료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비해 나갔다. 왕의 직속 기관인 집사부를 중심으로 정치를 운영하고, 이를 중심으로 위화부, 병부 등을 두어 행정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집사부의 그 장관인 시중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이로써 귀족 합의 기구인 화백의 권한이 축소되었다.

     또한, 사정부, 외사정 등 감찰기구를 설치하여 관리의 부정과 비리를 감찰하였다. 국학을 설립하여 유학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왕에게 충성하는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편, 국왕 중심으로 통치 권력이 더욱 집중되면서 진골 세력이 약화되자 6두품 세력은 왕의 정치적 조언자 역할을 하거나 중앙 행정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 지방 통치 제도의 정비

     지방은 9주 5소경 체제로 정비하였다. 전국을 9주로 나누고 그 밑에 군과 현을 두어 지방관을 파견하고, 외사정을 보내 지방관을 감찰하였다. 군현 아래의 촌은 토착 세력은 촌주가 다스리게 하였다. 또한,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지방 세력을 일정 기간 동안 수도에 올라와 있게 하는 상수리 제도를 시행하였다. 

     지방의 중심지에는 5소경을 설치하여 일부 중앙 귀족이나 고구려, 백제, 가야의 유민을 이주시켰다. 이를 통해 수도인 금성(경주)이 나라의 동남쪽에 치우친 약점을 보완하며 지역의 고른 성장을 꾀하고 새롭게 신라에 속하게 된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이 빠르게 정착할 수 있도록 하며 지방 세력을 회유하고 통제하였다. 한편 5소경은 지방의 정치와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군사 조직은 9서당10정을 중심으로 정비하였다. 중앙군인 9서당은 신라인뿐 아니라 옛 고구려・백제・말갈인까지 포함하여 민족 융합을 꾀하였다. 지방군인 10정은 각 주에 1정씩 배치하고, 국경 지역인 한주에는 2정을 배치하여 국방과 지방 치안을 담당하게 하였다. 

     통일 신라는 백성에게 조세, 공물, 역을 부과하였다. 호구와 재산을 기준으로 조세를 부과하였으며, 지역의 특산물을 공물로 거두였다. 16세에서 60세까지 남자에게는 군역 등 역을 부과하였다.

     통일 신라는 노동력 철저하게 파악하고 세금을 정확하게 거두기 위해 신라 촌락 문서를 작성하였다. 신라 촌락 문서에는 인구, 논과 맡의 면적, 소와 말, 뽕나무와 잣나무, 가래나무의 수 등을 3년에 한 번씩 자세하게 조사하여 기록하였다. 

 

 

 

 

 관료제 운영과 골품제

     통일 이전 신라는 관직 복무의 대가로 녹읍을 지급하였다. 통일 이후 통치 체제가 개편되면서 신라 관료 조직의 규모가 커지고 관등제의 적용을 받는 대상도 늘었다. 신문왕은 문무 관리에게 관직 복무의 대가로 관료전을 지급하였으며, 이후 녹읍을 폐지하고 녹봉을 지급하였다. 녹읍은 지급받은 토지에 대한 수조권이 있고 노동력 징발도 가능하였다. 그러나 관료전은 수조권만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조치로 귀족 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점차 토지 제도가 정비되면서 성덕왕 때에는 백성에게 정전을 나누어 주었다. 

     토지 제도의 개편은 국가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8세기 이후 귀족의 반발과 녹봉 지급에 따른 행정상의 번거로움 등으로 녹읍이 부활하였다. 

     한편, 통일 이후에도 골품제가 여전히 유지되면서 관료제의 운영을 제약하였다. 골품이 귀족들의 관등, 관직 등 정치적・사회적 지위를 규정하였고 골품에 따라 가옥의 규모와 장식물, 수레를 제한하는 등 일상생활에서 차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3두품 이하의 신분층에서는 골품의 구분이 점차 사라졌다. 

 

 

 

 

신라 말, 지배 체제의 동요

     8세기 후반에 이르러 신라의 왕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혜공왕이 피살된 뒤 무열왕계 왕실이 무너지고 중앙 진골 귀족 사이에서 왕위 쟁탈전이 일어나면서, 신라는 150여 년간 20명의 왕이 교체되는 혼란에 빠졌다.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면서 상대등의 권력이 다시 강화되었고, 귀족들의 연립에 의해 국가 정치가 운영되었다. 6두품 세력 중 일부는 진골 귀족의 권력 독점과 골품에 따른 관직 승진의 한계로 중앙 정치에서 자신의 능력을 펼칠 기회를 얻지 못하자 점차 반신라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다. 

     골품제에 기초한 신라 사회가 흔들리자 중앙 정부는 체제를 강화하여 위기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흥덕왕 때에는 사치 풍조를 금지하고 골품에 따라 차등을 둔 생활양식을 지키도록 규제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무거운 조세 수취와 귀족들의 농민 수탈은 계속되었다. 

     그 결과 지방에서는 농민 봉기가 빈번하게 일어났는데 김헌창 등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크게 약해졌다. 이 과정에서 농민은 중앙 정부와 지방 세력가에게 이중으로 수탈당했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이 봉기하여 신라 사회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이를 틈타 신라 각지에서는 군사력을 모아 스스로를 성주, 장군이라고 칭하는 호족 세력이 등장하였다. 이들을 중앙에서 밀려난 귀족, 촌주 혹은 지방에 주둔한 장군 등이 성장하여 이룬 세력이었다. 호족은 신라 사회에 불만을 품은 6두품 계열의 지식인, 선종 승려와 함께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세력을 확대한 유력 호족에 의해 후백제, 후고구려가 성립하면서 신라는 후삼국으로 분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