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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삼국의 종교와 사상 | 유교

삼국의 종교와 사상_유교

 

2006년 인천 계양산성의 유적에서 토기 및 기와 등의 유물과 함께 백제 또는 신라의 것으로 추정되는 목간이 발견되었다. 소나무로 만들어진 이 목간은 아래와 윗부분이 잘려나간 것으로 보인다. 또한 5각으로 된 목간의 각 면에는 먹으로 유교의 대표 경전인 ⌜논어⌟의 구절이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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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의 종교와 사상_유교

 

삼국시대 유학의 수용

     중국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들어온 유학도 삼국의 정치와 문화・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삼국은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행정 실무를 담당할 관료가 필요하자 교육 기관을 설립하여 유학적 소양을 갖추고 국가에 충성하는 인재를 키우려 하였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 중앙에 태학을 설립하고 귀족 자제에게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가르쳤다. 지방에는 경당을 두어 평민 자제에게 유학과 활쏘기를 가르쳤다. 백제는 태학을 설치하였으며 오경박사를 두어 유교 경전을 가르쳤고, 일본에 ⌜논어⌟ 등의 유교 경전을 전해주었다. 또한, 충과 효를 강조한 세속 5계, 임신서기석의 내용에서 신라에도 유학이 수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삼국은 유학을 관료의 육성과 충, 효 등 도덕규범을 강조하는 데 활용하였다. 이후 종묘를 설치하고 국가 의례를 행하는 등 제도를 정비하면서 점차 유학을 정치 이념으로 받아들였다.

     유학의 수준이 높아지고 중앙 집권 체제가 강화되면서 삼국에서는 역사서의 편찬이 이루어졌다. 삼국의 왕실은 역사서를 편찬하여 국력을 드러내고 왕실의 권위를 높여 백성의 충성심을 모으고자 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일찍이 ⌜유기⌟ 100권을 편찬하였으며, 영양왕 때에는 이문진이 이를 바탕으로 ⌜신집⌟ 5권을 편찬하였다. 백제에서는 근초고왕 때 박사 고흥이 ⌜서기⌟ 를 저술하였고, 신라에서는 진흥왕 때 이사부의 건의로 거칠부가 ⌜국사⌟ 를 편찬하였다. 현재 이들 역사서는 모두 전하지 않는다

 

 

 

 

통일 신라, 유학의 발달

     삼국 통일 이후 신라는 유학을 정치 이념으로 삼고 왕권 강화와 체제 안정을 위해 유학을 장려하였다. 신문왕은 국학을 설치하여 유학을 교육하였으며, 원성왕은 유교 경전을 이해한 정도에 따라 관리를 채용하고자 독서삼품과를 마련하였다. 이 시기에 6두품 세력은 학문적 능력을 바탕으로 왕에게 정치적 조언을 하고 실무를 담당하여 왕권을 뒷받침하였다. 독서삼품과는 진골 귀족들의 반발로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으나 유학을 보급하는 데 기여하였다. 

     유학의 장려 정책으로 삼국 통일 무렵에는 여러 문장가와 유학자가 배출되었다. 특히 6두품 출신이 많았는데, 강수는 외교 문서 작성에 능하였으며, 설총은 이두를 정리하고 유학 경전 보급에 힘썼다. 진골 출신인 김대문은 화랑의 전기를 모은 ⌜화랑세기⌟와 명망 있는 승려들의 전기를 모은 ⌜고승전⌟을 지어 신라 전통을 주체적으로 인식하려 하였다. 

    많은 신라인이 당으로 건너가 당의 국자감에서 유학을 공부하였으며, 빈공과에 합격하는 인물도 많았다. 특히 최치원은 당의 유학자와 교류하며 학문을 깊이 연구하였고,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한편, 최치원을 비롯한 신라의 6두품 출신 유학생들은 당에서 귀국한 후 골품제 사회를 비판하고 새로운 정치 이념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중앙 정부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이들은 지방에 은둔하거나 호족들과 손을 잡고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참여하였다. 

 

 

 

 

발해의 유학 발달

     발해는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수용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당에서 유교 경전을 비롯한 여러 서적을 들여와 문적원에서 관리하였다. 또한 유학 교육 기관으로 주자감을 설치하여 귀족 자제에게 유교 경전 교육을 하였다. 중앙 통치 기구인 6부의 명칭에는 유교 덕목을 붙인 것은 발해에서 유교 이념을 중시하였음을 알려준다. 또한, 당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문물을 수용하려 노력하였다. 

 

불로장생 도교

     삼국시대에는 중국으로부터 도교가 전래되어 고구려와 백제에서 귀족을 중심으로 유행하였다. 도교는 신선 사상을 바탕으로 산천 숭배, 민간 신앙 등이 결합하여 불로장생과 현세구복을 추구하였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는 신선 그림과 도교의 방위신으로서 죽은 자의 사후 세계를 지켜준다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백제의 산수무늬 벽돌에는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바람이 담겨 있고, 백제 금동 대향로 등에 도교적 이상 세계와 신선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한편, 고구려에서는 도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7세기경 연개소문은 귀족과 연계된 불교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당에 도사 파견을 요청하고 기존의 불교 사찰을 도교 사원으로 바꾸고 도교를 장려하기도 하였다. 

 

 

 

 

풍수지리설의 수용

     풍수지리설은 산, 하천, 땅이 이루는 형세가 인간 생활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이다. 삼국이 도읍을 정하거나 수도를 옮길 때 지리적 조건을 살핀 것이나 신라의 석탈해가 호공의 집터를 길지로 보고 빼앗았다고 하는 이야기 등은 삼국 시대에도 이미 풍수지리적인 인식이 있었던 것을 알려 준다.

     신라에서는 삼국 통일 이후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풍수지리에 관한 지식이 보다 깊어졌다. 신라 말에 이르러서는 도선과 같은 선종 승려들이 더욱 체계적인 풍수지리설을 들여와 신라 사회에 확산시켰다. 풍수지리설은 지방도 명당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여 수도인 금성(경주)을 중심으로 한 통치 질서와 국토에 대한 관념을 바꾸는 데 영향을 주었다. 신라에서는 지방에 사찰의 터를 잡거나 호족 세력이 근거지를 마련할 때 이러한 풍수지리설을 활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