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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자세히 보기] 귀주 대첩 | 거란을 좌절시킨 고려

귀주 대첩(龜州大捷) 

 

     귀주 대첩(龜州大捷)은 1019년(현종 10년) 상원수 강감찬 도통사와 원수 강민첨 대장군 휘하의 고려군이 거란군을 귀주(龜州)에서 물리쳐 승리한 전투이다. 이 전투의 승리로 26년에 걸쳐 이어진 고려 거란 전쟁의 대단원의 막이 내렸다.

     강감찬의 '귀주 대첩'은 고구려 을지문덕의 '살수 대첩'과 조선시대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대첩'이라 불린다.

 

썸네일 귀주 대첩
귀주 대첩

 

배경

     고려 태조는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 대해 '금수지국(禽獸之國)’이라 비판하였고,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고 옛 땅을 되찾는다는 의미에서 북진 정책(北進政策)을 국시로 삼았다. 거란이 두 차례 화친을 청하였으나 태조는 강경한 태도로 수교를 거부하였다. 고려는 정종 때 30만의 광군을 양성하고, 북쪽에 군사시설을 갖추어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였고, 송나라가 건국한 이후에는 송과 화친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고려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거란은 압록강 하류에 군사기지를 설치하고 고려에게 송과의 화친을 끊고 거란과 화친할 것을 요구하며 3차례 고려를 침공하였다.

 

     993년(성종 12) 10월 제1차 고려 거란 전쟁에서는 거란군을 이끈 소손녕과 서희가 담판을 벌여 고려가 강동 6주를 획득하였고, 1010년(현종 1) 11월 제2차 고려 거란 전쟁에서는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공해 왔으나 친조를 조건으로 강화를 맺고 돌아가던 중 양규와 김숙흥이 이끄는 고려군에게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다. 1018년(현종 9년) 12월 거란은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병력을 동원하여 고려를 침공, 제3차 고려 거란 전쟁이 발발하였다.

 

 

 

 

전개

     거란군의 대대적인 침공에 상원수 강감찬, 원수 강민첨(姜民瞻), 병마판관에 김종현이 임명되어 20만 8천의 대군으로 소배압을 막도록 하였다.

     압록강 유역에서 벌어진 흥화진 전투에서 고려는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쇠가죽으로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아두었다가 적병이 이르렀을 때 막았던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는 전술로 거란군을 크게 무찔렀다. 병력의 큰 손실에도 불구하고 수도 개경이 목표였던 거란군은 계속 남하하였다. 하지만 거란군은 자주에서 추격전을 벌인 강민첨에게 대패하고, 마탄에서도 조원에게 대패하였다.

     이어지는 패배에도 물러나지 않고 결국 수도 개경에서 약 100리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신은현에 도착한 거란군은, 또 한 번 고려군의 청야 작전에 당하고, 첩보를 통해 개경을 함락할 수 없음을 깨달은 소배압은 군사를 돌려 퇴각하였다. 추격하는 고려군을 막기 위한 약 300명의 기병대는 금교역에서 고려군의 습격에 전멸하고, 연주(漣州)와 위주(渭州)에서 또다시 강민첨 대장군의 기병에게 대패한다.

 

     1019년 2월1일, 고려군이 내륙길의 마지막 관문귀주성 앞 평원에서 상원수 강감찬은 수만의 대군을 이끌고 기다리고 있었다. 고려군이 먼저 하천을 하나 건너 평지로 내려오기 시작하자, 거란군도 퇴각이 아닌 전투를 결정했다. 양군은 막상막하로 치열하게 싸웠고, 쉽사리 승부가 갈리지 않았다. 때마침 개경에서 거란군을 추격하며 올라온 김종현의 철기 기마부대가 거란군의 후진을 습격하여 적을 혼란에 빠뜨렸고, 때마침 바람도 북풍에서 남풍으로 바뀌며 소나기가 찾아와 깃발이 나부끼며 북쪽을 향하자 고려군은 사기가 높아져 분발하여 공격하여 거란군은 완전히 참패하고 북으로 달아났다. 고려군은 거란병에 대한 총공세를 취하였는데, 강민첨이 이끄는 고려군은 귀주의 전면을 흐르는 석천(石川)을 지나 반령(盤嶺)까지 추격을 이어가 거란군은 겨우 수천 명만이 살아 돌아갔다.

 

 

 

 

의의

 

거란의 패함이 아직 이와 같이 심함이 없었다.
『고려사(高麗史)』

 

라고 전하고 있듯이, 당시 귀주대첩의 성과는 우리나라 전쟁사상 길이 빛나는 것이었다.

 

     귀주 대첩이 지닌 가장 큰 의의는 고려 침입에 대한 거란의 야욕을 좌절시킴과 동시에, 거란이 끈질기게 요구하여 왔던 국왕의 친조(親朝)와 강동 6주의 반환을 다시는 요구하지 않게 되었다는 데 있다.

     또한 송에서는 이 전쟁 이후 거란을 견제하기 위해 고려를 자신의 편으로 삼는 것이 유리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고, 만주지역의 여진족, 말갈족 등이 사신을 보내와 외교관계를 맺기도 하였는데, 이는 귀주대첩 이후에 동아시아에서 고려의 국제적 위상이 크게 상승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출처 - doopedia.co.kr

 

✓ 귀주(현재의 평안북도 구성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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