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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몽골의 간섭과 정치 변화

원의 간섭과 새로운 정치 세력의 성장

 

몽골군이 고려를 침략하자 무신 정권의 집권자 최우는 수도를 강화도로 옮길 것을 결정했다. 이에 개경의 백성은 장맛비를 맞으며 강화도로 들어갔다. 최우는 강화도에 궁궐을 짓게 하고 몽골이 재차 침입할 것에 대비하여 내성, 중성, 외성으로 구성된 성을 쌓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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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간섭과 정치 변화

 

 

몽골의 침략과 무신 정권의 몰락

     13세기 초에 칭기즈 칸이 몽골을 통합하며 세력을 확대하였다. 고려는 고려에 들어온 거란적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몽골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1219). 이후 몽골은 과도한 공물을 요구하며 고려를 압박하였고, 몽골 사신이 귀국길에 살해된 사건을 구실로 고려를 침입하였다(1231). 최우는 강화를 요청하여 몽골군을 물러나게 하는 한편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장기 항전을 준비하였다.

     다시 몽골이 쳐들어오자, 처인성, 충주성 등지에서 일반 백성과 하층민까지 몽골군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몽골의 거듭된 침입으로 국토는 황폐해졌고, 백성의 고통은 심해졌다. 몽골이 고려에 항복 조건을 낮추어 제시하자 무신들은 항전을 주도하던 최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몽골과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였다(1270). 한편 개경 환도를 반대한 삼별초는 진도,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며 항전하였지만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에게 진압되었다(1273).

 

 

 

 

몽골(원)의 간섭과 일원적 국제 질서의 강화

     몽골(원)과 강화 이후 고려왕은 원의 공주와 혼인하여 원 황제의 부마가 되었으며, 고려 왕실의 용어와 관제도 제후국 체제로 격하되었다. 원은 다루가치라는 관리와 일본 원정을 위해 설치되었던 정동행성을 통해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고, 고려 영토를 빼앗아 화주에 쌍성총관부, 서경에 동녕부, 제주에 탐라총관부 등을 설치하고 이 지역을 직접 지배하였다. 또한 조공이라는 명목으로 금, 은, 인삼 등의 물품과 공녀, 환관 등을 수시로 요구하였다. 

     원의 세력이 강성한 상황에서 충렬왕은 고려의 자주성과 실리를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원에 협조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부마의 지위를 이용하여 원 관리의 횡포를 막았다. 고려 국왕이 정동행성의 장관을 겸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여 성사시켰고, 동녕부와 탐라총관부도 돌려받았다.

     그러나 충렬왕 이후에는 자주적 외교가 약화되었고 원에서는 고려 국왕을 마음대로 임명하거나 교체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원 간섭기에 고려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 질서에 포함되었다.

 

 

 

 

공민왕의 자주성 회복과 내정 개혁

    원 간섭기에는 친원적 성향의 권문세족이 새로운 지배 계층으로 등장하였다. 권문세족은 친원적 성향이 강하였고, 주로 음서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여 도평의사사를 장악하고, 농장과 노비의 소유를 확대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그 결과 양인의 수가 줄어들어 국가 재정이 악화되었다. 이에 일부 개혁 세력은 정치도감을 설치하여 이들의 불법 행위를 바로잡으려 하였다. 하지만 원의 기황후에 힘입어 위세를 떨치던 기씨 일족이 정동행성이문소를 이용하여 개혁을 좌절시켰다.  

     14세기 중엽, 원의 쇠퇴를 계기로 공민왕은 반원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변발, 몽골식 의복 등 몽골식 풍습과 제도를 폐지하였으며, 기철 등 친원 세력을 제거하였다. 고려 정치에 간섭하던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고,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되찾았다. 제후국 수준으로 낮아졌던 왕실의 호칭과 관제를 고려 전기의 체제로 회복하였다. 공민왕은 원이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자 명목상의 사대 관계를 인정하여 국제 관계를 안정시켰다. 

     한편 승려 신돈을 등용하고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문세족 등이 불법으로 빼앗은 토지와 억울하게 노비로 삼은 양민을 되돌려 놓고자 하였다. 그리고 성균관과 과거제를 정비하고 신진 사대부를 등용하여 개혁을 뒷받침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권문세족의 반대,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에 따른 혼란 등으로 개혁을 지속하기 어려웠다. 

     한편, 명이 원을 몰아내고 중국을 장악하자 고려는 명과 국교를 맺었다. 그러나 명이 오히려 고려를 압박하자 권문세족은 원과 친할 것을 주장하며 내정 개혁에 반발하였다. 결국 신돈이 제거되고 공민왕이 시해되면서 개혁은 중단되었다. 

 

 

 

 

신진 사대부의 성장

     성리학은 안향이 원에서 들여와 고려에 전해졌고, 충선왕이 원에 세운 만권당에서 이제현이 원의 학자와 교류하며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 성리학이 고려 과거 시험이 과목에 포함되면서, 성리학을 공부하는 사람도 늘어났다. 특히 공민왕 때 성균관을 재정비하고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교육하면서 신진 사대부가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고려 후기에 원의 영향을 받아 전해진 성리학은 철학적 측면보다는 현실 실천 윤리 측면을 강조하였다. 신진 사대부들은 이러한 성리학 이념을 바탕으로 토지문제, 불교의 폐단 등을 비판하며 적극적으로 현실을 개혁하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