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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고려의 종교와 사상

다양한 종교와 사상이 유행하다

 

고려 인종이 병에 걸려 위독하자 왕의 회복을 기원하는 여러 종교 행사가 열렸다. 절에서 부처에게 기도하고 승려들에게 식사를 대접하였으며, 종묘와 사직에서 제사를 지내는 한편, 유교와 도교의 신에게도 빌었다. 무당이 인종의 병에 대해 척준경의 원혼이 깊은 탓이라 하자 이 말에 따라 이미 사망한 척준경을 사면하고 새로 쌓은 벽골제의 제방을 허물기도 하였다. 

 

썸네일 고려의 종교와 사상
고려의 종교와 사상

 

불교의 발달

 국가의 불교 보호와 서적 편찬

     불교는 고려인의 정신세계와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고려는 건국 초부터 숭불 정책을 추진하여, 국가 차원에서 팔관회와 연등회 등 불교 행사를 열었다. 승과를 실시하여 합격한 승려에게 승계를 주었으며, 신망 높은 승려를 왕사와 국사로 삼는 제도를 마련해 불교에 국교의 지위를 부여하였다. 고려 시대 승려의 사회적 위치는 매우 높아 왕실과 문벌 가문에서 승려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고려는 불교를 국가 통합에 적극 이용하였다. 고려 정부는 대규모 사찰을 지어 국가의 안녕과 국왕의 장수를 빌었다. 외적이 침입하면 부처의 힘을 빌려 이를 극복하고자 대규모 법회를 열었다. 현종 때 거란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을 조판하였고, 고종 때 몽골이 침략하자 팔만대장경판을 조판하였다. 불교의 입장에서 고유의 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이루어져 각훈은 우리나라 불교의 독자성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해동고승전⌟을 지었다. 한편, 선종의 수행서인 ⌜직지심체요절⌟이 간행되었는데, 이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본이다. 

 

 선종과 교종의 통합 노력

     고려 초기 불교는 선종과 교종으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숙종때 의천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화엄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하고 해동 천태종을 개창하고, 이론의 연마와 실천의 수행을 아울러 강조한 교관겸수를 내세워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통합하려 하였다. 하지만 의천이 죽은 뒤 불교 교단은 다시 분열되어 대립이 지속되었다. 

     무신 정권 시기 교종이 쇠퇴하고 선종이 융성하자 선종 승려를 중심으로 불교계를 개혁하려는 결사 운동이 일어났다. 조계종을 이끈 지눌은 세속화된 불교계를 비판하고 선교일치를 주장하며 정혜결사를 조직하였다. 참선 수행과 교학 공부의 병행을 주장한 지눌의 결사 운동이 호응을 얻으면서 수선사(송광사)가 성립하였다. 그리고 정혜쌍수와 돈오점수를 내세워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포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요세는 천태종을 중심으로 백련사 결사를 결성하여 참회의 실천을 강조하여 글을 읽지 못하거나 참선할 여유가 없었던 백성의 호응을 얻었다. 

     한편 지눌을 계승한 혜심은 유불 일치설을 내세워 유학과 불교의 통합을 시도하여 후에 성리학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원 간섭기 불교의 변화

     불교는 원 간섭기에는 개혁적 성향이 크게 약화되었다. 불교 사찰은 원과 고려 왕실의 후원을 얻어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수행보다는 복을 비는 행위에 힘썼다. 고려 말 사원들이 고리대를 일삼으며 농민의 토지를 빼앗고 농민을 노비로 만드는 등 불교계의 폐단이 심해졌다. 이에 불교가 백성과 멀어지고 신진 사대부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는 왕실과 권세가 후원으로 화려한 불화가 많이 제작되었다. 원으로부터 새로운 성향을 불교가 유입되면서 보우 혜근 등의 승려가 임제종을 수용하기도 하였다. 

 

 

 

 

유교 사상의 발달과 역사서의 편찬

     유교는 고려 건국 초부터 국가 정치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유교는 교육과 국가 의례, 역사서 편찬에 큰 영향을 주었다. 태조는 학교를 세워 유학을 진흥하였고, 광종은 과거제를 실시하여 유교 지식을 갖춘 인재를 관리로 선발하였다. 성종은 최승로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교 이념에 따라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수도의 국자감을 정비하고 12목에 경학박사를 파견하였으며 지방에 향교를 세워 유학 교육에 힘쓰면서 뛰어난 유학자도 많이 나왔다. 하였다. 고려 중기에는 최충 등 이름난 유학자가 배출되고, 9재 학당을 설립한 이후 사학 12도가 융성하였다.

     유교 사관에 따른 역사서도 편찬되었다. 김부식은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입각하여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구삼국사⌟의 신비한 내용을 대폭 삭제하였다. 이는 무신 정권기에 이규보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고려 후기에 이승휴는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기록한 ⌜제왕운기⌟를 저술하였으나 이 책에서는 교려를 중국의 제후국으로 인식하였다.

     고려 후기에는 성리학이 도입되었다. 이제현은 원의 학자들과 교류하며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고 이후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이 성리학을 확산시켰다. 고려말 신진 사대부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원 간섭기 이후 나타난 정치경제적 모순을 개혁하고자 노력하였다. 일부 신진 사대부는 불교의 폐단을 강하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성리학의 영향을 받은 역사서도 편찬되었다. 이제현은 기존 역사 기록을 성리학적 명분론에 맞추어 재해석하였다. 

 

 

 

 

토착 신앙의 유행과 관련 서적의 편찬

     고려 시대에는 불교, 유교와 더불어 토착신앙, 도교와 풍수지리설도 유행하였다. 국가에서는 동명성왕과 태조 왕건을 신으로 섬겼고, 국왕도 용의 후손으로 여겨 신성시하였다. 개경과 서경에서는 하늘의 신령과 산, 강, 용을 섬기는 팔관회를 매년 성대하게 열었다. 지방에서도 산신과 수신을 위한 축제를 베풀었고, 고을의 위인을 수호신으로 섬겼다.

     도교는 주로 귀족과 왕실에서 믿었다. 귀족은 안락한 생활을 하며 신선술에 관심을 가졌고, 국가 차원에서 도교 사원을 세우고 도교 의례를 지내 국가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였으며, 초제를 열어 국왕의 장수를 빌었다. 그러나 이 시기 도교는 독자적인 교리 체계와 교단을 갖추지는 못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풍수지리설이 예언 사상과 결합하여 유행하였다. 서경 길지설에 따라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고, 묘청이 서경 천도를 추진할 때도 이용되었다. 풍수지러설에 따라 한양이 남경으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또한 다양한 토착 신앙과 사상을 수용한 서적의 편찬이 활발하였다. ⌜구삼국사⌟에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역사가 신비한 내용과 함께 수록되었고, ⌜해동비록⌟에는 풍수지리설과 음양설 등 각종 예언을 종합하였다. 승려 일연은 불교의 설화적 전승을 중심으로 민간 신화 등을 수집하여 ⌜삼국유사⌟를 저술하였다. ⌜삼국유사⌟에서는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기록하여 통합된 민족의식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