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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자세히 보기] 위화도 회군

위화도 회군,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

 

위화도회군은 1388년(우왕 14년)에 우왕의 명령을 받아 요동 공격을 위해 진군했던 이성계 등이 이끄는 군대가 압록강 중앙에 위치한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과 최영을 제거하고 고려의 실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썸네일 위화도 회군
위화도 회군

 

배경

     14세기 중엽 원이 점점 쇠퇴하자 당시 즉위한 공민왕은 이 기회를 틈타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몽골의 침입으로 빼앗긴 쌍성총관부를 회복하고, 1369년(공민왕 18년)부터 원을 몽골 고원으로 쫓아내고 중국 본토를 새로 장악한 주원장의 명과 새로 외교를 맺었다. 공민왕은 1360~70년대 초에 세 차례 군대를 보내 북원이 지배하고 있던 요동 지방을 공격해 이곳의 원의 세력을 몰아내고 그 지역에 살고 있던 고려인들을 통치 영역에 편입시키고자 하여 일정한 성과를 이루었다. 이런 상황에서 명의 세력이 요동에 미치면서 명과 고려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 외에도 고려는 중대한 문제에 봉착해 있었다. 권문세족이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대토지 소유를 확대해 나가면서,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고 백성의 생활이 극도로 어려워졌다. 또한 북쪽에서 홍건적이 침입해 와 개경을 함락시켜 큰 피해를 주고, 공민왕이 복주(안동)까지 피난하기도 하였고, 남쪽에서는 왜구의 노략질이 계속되어 해안 지방을 황폐하게 하였다.

 

 

     이러한 고려 사회의 내우외환 속에 새로운 세력들이 부상했다. 고려는 적극적으로 남과 북의 외적에 대한 토벌 작전을 수행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최영과 이성계는 큰 전과를 올려 국민의 신망을 얻었다. 최영(崔瑩)은 30년 동안 왜구를 토벌한 명성 높은 백전노장이었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부친의 유훈을 충실히 따르며 청렴 강직 하였으나, 권문세족 출신으로 구세력의 대표자였다. 반면 이성계(李成桂)는 쌍성총관부의 유력자인 환조(이자춘)의 아들로,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회복할 때 아버지와 함께 고려로 귀순했다. 그는 장군으로서 전투에서 늘 승리를 거두며 큰 공을 세웠고, 실력으로 출세한 지방 세력가의 아들이자 신세력의 대표자로 떠올랐다. 

 

     고려 사회의 내부적 문제를 개혁할 주체로서 신진사대부들이 부상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성리학을 수용하여 고려사회를 개혁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우왕 때 이인임이 북원과 외교 관계를 재개하려는 것에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급진파 신진 사대부들은 신흥 무장 세력으로 떠오르던 이성계와 결탁하여 새로운 시대를 모색했다. 특히 정도전은 이성계를 직접 찾아가 그의 군대가 질서 정연함을 보고 자신의 기대를 표명하기도 했다. 

 

      1387년(우왕禑王 13년)에 최영이 이성계를 위시한 사대부 세력의 뒷받침을 받아 이인임 일파를 축출하였다. 그러나 최영과 이성계는 개혁의 방향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다. 

 

요동정벌의 전개

     1388년(우왕 14년), 명나라 홍무제 주원장이 친서를 보내 철령(鐵嶺) 이북의 고려 영토가 원의 영토였었다는 이유로 반환하고 중국인・여진인・고려인을 그대로 요동에 소속시키라는 요구를 하였다. 이러한 주장에 따라, 명나라와의 관계는 긴장감 높아졌고, 고려는 명나라와의 강력한 대립을 준비하게 되었다.

     명에서 정식으로 철령위 설치를 통고해 오자 우왕과 최영은 요동정벌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당시 고려의 전쟁 능력, 시기 효과 등 현실적인 측면을 고려하여 요동정벌이 불가한 4가지 이유를 왕에게 아뢰었다.

 

 

사불가론(四不可論)

첫째, 군량미・군사 규모 등에서 명과 대결할 만한 능력을 갖지 못한 약소국이 강대국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상책이 아니다.

둘째, 여름에 군사를 동원할 수 없다.

셋째, 온 나라 군사를 동원하여 멀리 정벌하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탈 것이다.

넷째, 지금 한창 장마철이므로 활은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들은 역병을 앓을 것이다.

 

 

     이성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왕은 전국에서 5만여 명의 군사를 징발하고 최영과 함께 서해도로 나가서 요동 정벌을 준비하였다. 최영은 팔도 도통사, 조민수는 좌군 도통사, 이성계는 우군 도통사로 임명하여 요동정벌군을 조직했다.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

     1388년 5월 좌・우군은 압록강 가운데에 있는 섬 위화도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도망치는 군사가 속출하였고 폭우로 강물이 범람하고 군사 중에서는 환자가 발생하여 압록강을 건너기가 어렵게 되자, 이성계는 요동 정벌을 포기할 것을 우왕에게 재차 청했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요동정벌을 독촉하였다. 이에 이성계는 죄군 도통사 조민수와 협의를 거쳐 회군의 뜻을 결심하고 5월 22일 위화도 회군을 결행하였다. 회군의 명분은 '상국(명)을 침범하면 나라와 백성에게 화를 초래하게 된다', '임금 곁에 있는 악한 신하들을 제거하여 백성이 편히 살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이성계와 조민수가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자, 우왕과 최영은 평양에서 송도(개경)로 급히 귀경하여 이성계 군에 반격을 시도했다. 불리한 전황에도 불구하고, 우왕과 최영은 이성계와 조민수의 선발대를 격파하고, 이후에는 조민수의 본대까지 공격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성계의 본대가 공격해 오자 결국 전력의 압도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결국 승리한 원정군은 최영을 사로잡아 고봉현(고양)으로 귀양 보내고 12월에는 개경으로 압송돼 처형되다. 또한 우왕도 폐위하여 강화도로 추방되었지만, 1년 뒤에는 아들 창왕과 함께 처형당했다. 그러나 회군에 성공한 이후, 회군을 주도한 이성계와 조민수 사이에 분열이 생겼고, 개혁에 반대하는 조민수는 유배되어 이성계와 급진파 신진사대부들이 정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게 되었다. 이렇게 신세력이 구세력을 완전히 몰아냄으로써 위화도회군의 뒷수습이 끝나게 된다.

위화도회군 지도
위화도회군 지도 출처-우리역사넷

 

 

결과

     이성계의 거사는 단순히 신·구 세력의 교체뿐만 아니라, 신흥 무인 세력과 급진 개혁 세력이 한반도에서 조선 왕조를 창건하는 기초를 확립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공민왕 후반기에 등장한 신진사대부들은 신흥 무인 세력과의 동맹을 통해 강력한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지만, 최영은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의 입장을 동시에 수용하지 않았다.

     우왕 즉위 초기에는 신진사대부들이 이인임·최영과 대립했다. 그러나 북쪽에서의 홍건적과 남쪽에서의 왜구 침입에 대해 최영과 이성계 등은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우고, 최영과 이성계의 연합으로 이인임 일당이 제거되자, 정도전과 조준을 중심으로 한 급진 신진사대부 세력은 이성계와 협력하여 최영을 추방하고, 우왕을 폐위시키고,  조민수를 추방하고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등의 일련의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이후 정도전, 조준 등의 급진 신진사대부들은 기반을 다진 이후 과전법을 시행하여, 이후 조선 개국공신이 되어 경제적인 기반을 강화하였다. 이후 1392년에는 공양왕에게 강제로 선위(임금의 자리를 물려줌)를 요구하여 조선이 개국하는 중요한 사건을 맞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