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한국사

[한국사] 조선의 대외 관계 변화

조선의 외교 정책의 변화

 

임진왜란 때 조선의 주력선은 이층 구조로 만들어진 판옥선이었다. 판옥선은 노 젓는 공간과 전투 공간이 분리되어 넓은 전투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배가 단단하고 무거워 적의 배에 충격을 가할 수 있었고, 포를 쏴도 흔들리지 않았다. 조선 수군은 이런 강점을 갖춘 판옥선을 이용하여 해전에서 큰 성과를 올렸다. 

 

썸네일 조선의 대외 관계 변화
조선의 대외 관계 변화

 

 

사대교린 외교

     조선은 건국 초기에는 태조와 정도전이 요동 정벌을 추진하는 등으로 명과 마찰이 있었지만, 태종 즉위 이후에는 조공과 책봉 체제를 바탕으로 하는 사대 외교를 펼쳐 명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다. 조선은 명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품을 보냈으며, 명에게 책봉을 받고 명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책봉은 각국의 독립성을 인정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형식적인 절차로, 책봉국은 왕권의 안정과 국제적인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명은 조공에 대한 답례로 서적, 약재, 도자기 등의 물품을 보냈다. 이는 당시 명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 관계 속에서 왕권을 안정시키고 경제・문화적 실리를 취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조선은 일본, 여진 등과는 교린 관계를 맺고 회유책과 강경책을 함께 펼쳤다. 우선 여진에는 귀순을 적극 장려하고 국경 지대에 무역소를 설치하여 교역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여진인이 국경을 침범하여 약탈을 행하는 경우 군대를 동원하여 강경하게 토벌하였다. 조선은 건국 직후부터 북방 영토 확장에 나서 태종 때 명으로부터 북방 지역의 관할권을 인정받았다. 여진의 약탈이 계속되자 세종 때에는 여진을 내몰아 압록강 지역에 최윤덕을 파견하여 4군을 설치하고, 두만강 지역에 김종서를 파견하여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까지 영토를 넓혔다. 조선은 이 지역에 남부 지방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그 지역의 토착민을 토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귀화한 여진족 지배층에게는 관직을 수여하고 토지를 주기도 하였다. 

     조선은 일본의 막부 정권과도 교린 관계를 맺었다. 고려 말 극심했던 왜구의 침략이 조선 초기까지 지속되자, 정부는 무기를 개발하여 왜구를 격퇴하는 한편, 왜구 제압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인 대마도 도주를 통화 막부와 협의하려 하였다. 그러나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세종 때에 이종무를 보내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섬을 토벌하고 일본과의 교역을 중단하였다. 이후 일본이 교역을 요청하자 삼포(부산포(부산 동래)・제포(창원 진해)・염포(울산))를 개방하여 제한적으로 교역을 허용하였다. 일본과의 교역은 왜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두 나라는 사신을 보내 교류하였다. 한편, 조선 정부가 삼포에 거주하던 일본인에 대한 무역 통제를 강화하자 일본인이 소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삼포 왜란).

     그 밖에도 조선은 시암(태국), 자와(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 및 류큐(오키나와)와도 교류하였다. 이들 국가는 사신을 통해 각종 토산품을 조선에 가져와 옷감, 문방구 등과 바꾸어 갔다. 특히 류큐와의 교역이 활발하여 류큐의 사신이 조선을 방문하여 불경, 범종, 유교 경전, 부채 등을 가져갔다. 

 

 

 

 

왜란의 전개와 결과

     16세기에 들어 여진과 왜인이 국경에서 자주 소란을 일으켰다. 조선은 국방 문제를 전담하는 비변사를 설치하는 등 변화하는 정세에 대비하려 하였으나, 군역이 문란해지면서 국방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 시대를 끝내고 일본을 통일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불평 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돌리고 대륙 침략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조선을 침략하였다(임진왜란, 1592).

     조선은 전쟁 초기에는 국방력의 차이로 왜군을 막아 내지 못하고, 20일 만에 수도인 한성을 빼앗겼다.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별도의 조정을 이끌게 하고, 의주로 피란하여 명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남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여 왜군의 수륙 병진 작전을 좌절시켰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활약하여 일본군에게 타격을 주었다. 관군도 전열을 정비하여 명군과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이후 남해안 일대로 밀려난 왜군은 휴전 회담을 제의하였으나 3년에 걸친 휴전 협상이 결렬되자 왜군이 다시 침략해 왔다(정유재란, 1597). 이에 조선과 명의 군대가 일본군의 북진을 막고 이순신이 명량에서 이들을 대파하였다. 전세가 불리해지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왜군은 일본으로 철수하였고,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은 끝이 났다.

     임진왜란은 조선뿐 아니라 동아시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은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해졌고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으며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높아졌고, 원군을 보내준 명에 대해 '망해 가던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라는 의미에서 '재조지은'이라 하며 숭상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중국에서는 전쟁 이후 명의 국력이 쇠퇴한 틈을 타 만주 지역의 여진(후금)이 급속하게 세력을 확장하였다. 일본에서는 에도 막부가 성립되었다.

 

 

 

 

호란의 전개

     광해군은 왜란의 피해를 극복하기 위해 토지대장을 정비하고 대동법을 실시하며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국방력을 강화하였다. 대외적으로는 후금과 명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추진하였다.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반대하던 서인은 인조반정(1623)을 일으켜 정권을 잡고, 명을 가까이하고 후금을 배척하는 친명 배금 정책을 펼쳤다. 이에 후금은 가도에 주둔 중인 명의 모문룡을 제거하고 조선으로부터 경제적 이득을 얻기 이해 조선을 침략하였다(정묘호란, 1627). 이에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였다. 의병장 정봉수가 용골산성에서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자 후금은 조선과 형제 관계를 맺고 돌아갔다.

     세력을 키운 후금이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하자 조선 정부는 화의를 맺자는 주화론과 무력으로 대응하자는 척화론으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논쟁 끝에 척화론이 힘을 얻어 청의 군신 관계요구를 거부하자, 청 태종이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다시 침략하였다(병자호란, 1636).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항전을 꾀하였으나 결국 항복하고 삼전도에서 청과 군신 관계를 맺었다. 

 

 

 

 

북벌론과 북학론의 대두

     병자호란 결과 청과 굴욕적인 강화를 맺자 조선 사회는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특히 청에 볼모로 잡혀갔다 돌아와 왕위에 오른 효종은 송시열, 이완 등과 함께 청에 당한 치욕을 씻고 명에 의리를 지키자는 북벌론을 추진하여 군대를 양성하는 등 북벌을 준비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숙종 초에도 남인을 중심으로 북벌론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청의 세력이 더욱 강해지고, 늘어나는 군비로 재정이 악화되자 북벌 계획은 중단되었다.

     청이 중국을 장악한 이후에도 조선의 지식인들은 여전히 청을 오랑캐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중국에 가서 청의 발전된 모습을 보고 자극을 받은 일부 실학자와 지식인은 청의 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을 발전시키자는 북학론을 제기하였다. 특히 박제가는 무역선을 파견하여 청에서 이뤄지는 세계 무역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북학파의 주장은 19세기 후반 개화사상으로 계승되었다.

 

 

 

 

조선의 세계관 변화

     조선 후기에는 중국에 갔던 사신을 통해 자명종과 천리경(망원경)이 들어오고, 세계 지도인 '곤여만국전도'와 서양 역법인 시헌력이 전래되는 등 서양 과학 기술이 조선에 전해졌다. 서양의 과학 기술은 실학자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 지식인들이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이익은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하였으며, 김석문과 홍대용은 지전설을 내세웠다.

     호란 이후 조선의 지식인 사이에서는 멸망한 명을 대신하여 조선을 중화 문명의 정통을 계승한 유일한 나라로 보는 시각이 나타났다. 이는 우리의 역사와 국토에 대한 관심을 자극하여 국학 연구가 활발해지게 되었다. 

 

 

 

 

현행사와 통신사 파견

     왜란과 호란 이후 조선은 청에 연행사,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여 평화를 유지하고, 경제・문화적 교류를 이어갔다.

     조선은 청과의 외교를 굴욕적으로 여겼다. 하지만 청이 중국을 장악한 후에는 청을 중심으로 한 조공・책봉 관계가 자리 잡았다. 연행사는 청의 발전된 문물과 청에 들어온 서양 문물을 조선에 전하는 통로 역할을 하였다.

    왜란 이후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을 잡아 에도 막부가 성립하였다. 일본은 조선의 기술자나 학자 등을 통해 인쇄술과 도자기 제조법, 성리학을 받아들여 문화를 발전시켰다. 에도 막부가 조선에 국교 재개를 요청하자, 이에 조선은 기유약조를 맺고 제한된 범위 내에서 무역을 허용하는 한편, 에도 막부의 요청으로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통신사는 외교 사절의 역할과 함께 양국의 문물 교류에도 기여하였다.

 

 

 

 

백두산정계비와 안용복의 독도수호

     청은 중국을 차지한 뒤 자신들의 본거지인 만주 지역을 성역화하고 출입을 통제하였다. 하지만 당시 국경 지대에 살고 있던 조선인 중에는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산삼을 채취하거나 사냥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청이 양국의 경계를 명확히 할 것을 요구하자 조선과 청의 관리가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국경을 확정해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1712).

     한편 조선 후기에는 일본 어민들이 울릉도와 독도를 자주 침범하였다. 이에 숙종 때 동래 어민 안용복이 일본 어민들을 내쫓고, 일본까지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받고 돌아왔다. 이를 계기로 조선 정부는 일본의 에도 막부와 울릉도 및 독도 귀속 문제를 확정하고, 정기적으로 관리를 파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