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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자세히 보기] 충무공 이순신의 3대 대첩 | 명량 대첩

명량 대첩(鳴梁大捷)

명량 대첩은 1597년 9월 16일(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명량 해협(울돌목)에서 이순신(李舜臣)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의 함선 13척이 일본 수군 함선을 대파한 해전이다. 

 

썸네일 이순신의 3대 대첩 | 명량대첩
명량 대첩

 

배경

     임진왜란 중 명과 일본의 강화 협상이 결렬되자, 일본은 1597년 1월 다시 조선을 침략하였다. 이를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 부른다. 일본은 지난번 조선 침략의 실패는 제해권을 갖지 못한 것이라 판단하고 먼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제거하려는 계책을 꾸몄다. 당시 당쟁 중이던 조정 중신들의 반발로 이순신을 파직, 체포하고 원균(元均)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이순신은 간신히 죽음을 면하고 도원수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되었는데, 이는 일본의 이간책에 말려든 것이었다.

     이순신을 대신하여 조선 수군을 지휘하게 된 원균은 삼도수군 160여 척을 이끌고 출정하였으나, 함대 통솔 및 기본적인 경계에 실패하는 등 잘못된 지휘로 인하여 1597년 7월 16일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 수군에 대패하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 수군 장수들 및 원균도 전사하였다. 이로 인해 이순신이 파직될 당시만 해도 전선 130여 척, 병력 13,000여 명에 이르는 조선 수군은 철저히 괴멸되었고, 오직 경상우수사 배설이 이끌고 있던 십 여척이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삼도수군이 일시에 무너지고 일본 수군은 남해일원의 제해권을 장악하여 서해로의 진출이 가능하게 되었다. 

     칠천량 해전의 패전 및 수군의 괴멸 소식을 들은 조선 조정은 크게 놀라 백의종군한 이순신을 복권, 삼도수군통제사로 선임하여 수군의 전열을 재정비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순신이 거느린 병사는 120명에 지나지 않았고 전선 역시 배설이 통솔한 12척 외에 추가 보충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알고 있었던 조정에서는 빈약한 수군을 폐지하고 육군에 합류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자 이순신은 전쟁이 일어난 임진년부터 5~6년 동안 적이 감히 충청과 전라를 바로 공격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목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수군 폐지 불가론을 펼치며 선조에게 다음과 같은 장계를 올렸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 있으니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수 있사옵니다. 비록 전선은 적지만 신이 죽지 않은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전개

    이순신은 서해 진출의 물목이 되는 명량을 지키기 위하여 이진을 거쳐 어란포로 진영을 옮겼고,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거느리고 온 전선 1척이 합류하여 전선 13척의 진용을 갖추게 되었다. 일본 수군은 한산섬을 지나 남해안 일대에 침범하였는데, 1592년 전훈을 참조하여 내륙으로 진격함과 동시에 서해의 해상권과 전라도를 장악하고자 하였고, 구루시마, 도도, 가토, 구키 등이 지휘하는 300여 척의 대함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순신의 복귀를 알고 있었지만, 단 13척의 함선으로는 일본 수군에 맞설 수 없을 것으로 판단했고, 칠천량 해전의 승리로 일본 수군의 사기가 높아졌기에 압도적인 전력으로 이순신의 수군을 격파할 것을 결의했다.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은 장도를 거쳐 명량 해협을 바로 뒤에 둔 진도의 벽파진으로 이동했고 주변에 정탐선을 보내 일본 수군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하지만 조선 수군은 겁에 질려 있었고, 강한 북풍과 추위로 전투력 유지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순신은 병사들에게 엄하게 명하면서도 직접 전선에 나가 일본 함대의 습격을 무력화시키며 지휘관으로서 신뢰를 쌓았고 장병들을 배불리 먹여 사기를 진작시켰다.

     9월 14일 일본 함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보고를 받고, 적은 수의 전선으로 명량해협을 등지고 싸우는 것이 매우 불리하다고 판단, 9월 15일 진영을 벽파진에서 명량해협 서쪽의 우수영으로 옮겼다. 명량대첩 직전인 이날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必死則生, 必生則死). 한 사람이 길을 막으면 족히 천 명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고 하였으니, 지금 우리를 가리키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기면 마땅히 군율로써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엄히 말하였다. 

 

 

 

 

     9월 16일 이른 아침 일본 수군이 명량으로 진입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된 이순신은 출전명령을 내리고 최선두에 서서 명량으로 향하였다. 

     울돌목(명량해협)은 수심이 얕아 배가 항해할 수 있는 범위가 좁고, 특히 밀물 때 넓은 남해의 바닷물이 좁은 해협으로 한꺼번에 밀려들어가 서해로 빠져나가면서 해안의 양쪽을 따라 급경사를 이루며 급류가 형성되었다. 더불어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암초로 인해 급조류가 암초에 부딪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소용돌이를 형성했다.

     일본 수군은 이 울돌목을 빠르게 통과하여 육군을 지원하기로 계획 했는데, 특히 해적 출신의 구루시마 수군이 물살이 빠른 해역에 익숙했기 때문에 이순신이 막더라도 순조롭게 전질 할 수 있을 것으로 자신했다. 일본 수군은 300여 척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명량해협의 지형 때문에 선체가 크고 전투력이 강한 주력선은 해협 밖에서 대기하도록 하고, 중형 군선만 좁은 수로를 통과하여 조선 수군과 대결하도록 했는데 그 수는 130여 척이었고 진영을 짜 10여 척씩 대열을 맞추며 통과하고 있었다.

     명량해협의 조류가 이른 아침에는 북서쪽으로 흐르고 있어서, 7~8시 경 일본 수군은 조류를 타고 빠르게 전진할 수 있었다.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의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일자진을 형성하여 명량으로 들어섰고, 이순신 대장선의 즉각적 포격으로 일본 군선 3~4척이 격침되었다. 하지만 일본 수군은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조선 수군을 겹으로 에워쌌다. 이순신의 함선은 선두에 서서 일본 수군을 공격하였고,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나 있던 중군(中軍) 김응함(金應諴)과 거제현량 안위를 합류시켜 더욱 치열한 전투를 하게 되었다. 녹도만호 송여종, 평산포 대장 정응두 등 여러 장수와 병사들이 함께 와서 공격하여 안위를 공격하던 적군이 전멸하였다. 이때 항복한 왜인 준사(俊沙)가 바다에 떠 있는 시체가 적장 마다시(馬多時)라고 알려주어 이순신은 그를 끌어올려 목을 베어 높이 매다니 조선 수군의 사기는 급격히 올라갔고 반면에 전투 중 지휘관이 참수된 것을 본 일본 수군의 기세는 극도로 저하되었다.

     이렇게 격전이 이어지는 도중 조류의 방향이 조선 수군에 유리한 흐름인 남동쪽으로 바뀌어, 조선 수군은 일시에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나아가 총통과 화살을 쏘며 일본 수군을 공격했다. 일본 수군은 좁은 해협에 많은 수의 전선을 끌고 왔기에 급한 역류의 상황에 배를 선회할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지 못했고, 군선이 많은 것이 오히려 독이 되어 군선끼리 서로 부딪히기 시작했다. 이에 전투의 기세를 잡은 조선 수군은 현자총통과 각종 화전을 쏘면서 맹렬하게 공격하였다. 또한 이순신이 철사를 엮어 만든 300kg가량의 철선에 의해 부수적으로 더 많은 일본 수군의 함선이 파손되어 침몰하였다. 일본 수군은 총 330척의 함선 중 잔존 함선 10여 척만 도망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 수군 장수 구루시마가 전사하였으며 도도를 비롯한 일부 장수들이 부상을 입었다. 유시(酉時, 오후 5시~7시)무렵, 전투는 끝났다. 이렇게 명량해전은 조선 수군의 대승으로 종결되었다.

 

명량해전 전개도
명량해전 전개도 By Seokjihyang

 

 

 

 

 

결과

     전투에 참여한 일본 수군의 전선 330여 척 중 30여 척이 초전에 격침되었고, 또한 추가적으로 철선과 해류에 휩싸여 침몰하거나 거의 대파한 함선이 격침 함선을 포함하여 320여 척이었다. 또한 왜군의 대형 군선에는 약 100~120명씩 타고 있었으므로 최소 3000여 명 ~ 4000여 명의 전사자가 났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반면 조선 수군은 전사자·부상자는 있었으나 1척의 전선도 격파되지 않았다.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10배 이상의 적을 맞아  불가능에 가까운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순신 스스로도 “이것은 실로 천행이다(此實天幸).”라고 할 만큼, 명량 해전은 기적에 가까운 전투였고, 칠천량 해전 이후 거침없이 서진하던 일본 수군을 저지한 중요한 전투였다. 이는 이순신의 뛰어난 지휘조선 수군의 분투가 없었으면 절대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일본의 수륙병진 전략은 실패로 돌아갔고, 정유재란의 대세를 조선군에게 유리하게 전개할 수 있게 하였다.

     명량 대첩은 이순신의 여러 승리 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승리라는 점에서 이순신의 위대함을 전하는 사례로 기억되었고, 조선군이 거둔 “대첩” 중 하나로 전해졌으며, 1688년(숙종 16년) 이를 기념하는 명량대첩비(鳴梁大捷碑)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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