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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자세히 보기] 충무공 이순신의 3대 대첩 | 한산도 대첩

한산도 대첩(閑山島大捷)

 

한산도 대첩은 임진왜란 때인 1592년 7월 8일(선조 25년) 통영 한산도 앞바다에서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 등이 거느린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의 주력대를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이 전투에서 육지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해전에서 펼쳤다. 

 

썸네일 한산도 대첩
한산도 대첩

 

배경

     1592년 4월 왜군은 수륙병진계획으로 조선을 침략하였다. 그러나 일본 수군은 남해와 서해를 침범하던 중 옥포, 합포, 적진포(1차 출전),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2차 출전)에서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의 함대에 연전연패하였다. 그 후 일본은 해전의 패배를 만회하고자 병력을 증강시켰다. 육지전에 참가 중이던 수군장 와키자카, 구키, 가토 등에게 조선 수군 제거와 보급로 확보를 위한 일전 명령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로부터 하달되었다. 

 

 

전개

     조선수군은 2차 출전 후 귀환하여 다음 전쟁을 대비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가덕・거제 등지에 일본 군선이 출몰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7월 4일 이억기(李億祺)의 함대와 합류, 전라좌,우도의 48척의 함대를 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훈련을 실시했고 다음 날 본영을 떠나 노량에 도착하여 원균의 7척 함대와 합세, 총 55척의 연합함대로 전선을 이끌었다. 

     7일 저녁 당포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목동 김천손에게 일본 군선 70여 척이 고성과 거제의 경계인 견내량에 머무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8일 한산섬 앞바다에 이르러 일본의 본대를 확인하였는데, 그때 일본 수군의 세력은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 등 모두 73척으로 지휘관은 수군장수 와키자카였다. 

     견내량(見乃梁)은 수심이 앝고 암초가 많은 데다 길고 좁은 해협이어서 판옥선(板屋船)이 전투를 벌이기에 부적합하였고, 육지에 가까워 일본 수군이 상륙하기에도 수월했다. 반면에 한산도는 거제도와 통영 사이에 위치하여 사방으로 탈출할 길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한산도는 당시 무인도에 가까운 섬이어서 상륙한다 해도 굶어 죽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이에 따라 판옥선을 활용하여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해 일본군을 격멸할 계획을 세웠다.

     먼저 판옥선 5,6척이 일본 선봉과 전투하다가 거짓으로 패해 달아나는 것처럼 하니, 일본 함대가 한산도 앞 넓은 바다에까지 추격해 왔다. 한산도 앞바다에 일본 함대가 도달하는 순간, 대기하던 조선 함대가 일시에 선회하여 학익진(鶴翼陣)을 형성하면서 공격하였다. 여러 장수와 군사들은 지자·승자·현자총통(玄字銃筒) 등 각종 총통을 쏘면서 돌진하여 적선 2~3척을 격파하였다. 일본군은 도망치려 하였으나 학익진에 의한 포위공격을 펼치는 바람에 도주에 실패하고 대패였다. 싸움의 결과 중위장 권준(權俊)이 층각대선(層閣大船) 1척을 나포하는 것을 비롯해 47척을 불살라 격침시켰고 12척을 나포하였다. 일본 수군 장수 와키자카는 패잔선 14척을 이끌고 도주했고, 한산도에 상륙한 400명과 탈출한 14척의 배에 탄 병력을 제외하고 일본 수군 3천여 명 이상이 이 전투로 전사하였다. 

 

 

 

한산도 대첩 학익진 그림
한산도 대첩

 

 

 

결과

     한산도 대첩(閑山島大捷)은 진주대첩(晉州城大捷, 1592.10.5.∼10.), 행주대첩(幸州大捷, 1593.2.12.)과 더불어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불린다. 한산도 대첩은 임진왜란 전체 국면에 끼친 영향이 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수군에게 '해전 금지' 명령을 내리는 등  일본의 전략을 수정하도록 했고, 조선 수군이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을 확보함으로써 이미 상륙한 적군에게도 위협이 되었다. 유성룡이 ⌜징비록(懲毖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산도 대첩으로 일본의 수륙병진 전략을 무력화하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육지에서 잇단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진 조선군에게 승리의 용기를 주었고, 전라도와 충청도가 보전되어 조선에게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며 그때까지 매우 불리했던 임진왜란의 전세를 유리하게 전환할 수 있었다. 외국의 역사가 헐버트(Hulbert, H. G.)도 “이 해전은 조선의 살라미스(Salamis) 해전이라 할 수 있다. 이 해전이야말로 도요토미의 조선 침략에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다…….”라고 하였다. 해전을 승리로 이끈 전공으로 이순신은 정헌대부(正憲大夫, 정2품), 이억기·원균은 가의대부(嘉義大夫, 종2품)의 관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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