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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자세히 보기] 충무공 이순신의 3대 대첩 | 노량 대첩

노량 대첩(露梁大捷)

 

노량 대첩은 1598년 11월 19일(선조 31년) 정유재란 당시 노량 앞바다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조명 연합수군이 철군하던 왜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이다. 임진왜란-정유재란 7년 전쟁을 끝낸 전투이자 바다에서의 마지막 싸움이며, 이순신이 승리와 함께 전사한 해전이다.  

 

썸네일 노량대첩
노량대첩

 

배경

     1597년 조선을 재침략한 왜군은 그 해 9월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패배한 데 뒤이어 도독 유정(劉綎)과 진린(陳璘)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의 참전으로 남부 제해권이 조명 연합군에게 넘어가게 되자, 해상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당하였고 육전에서도 계속 고전하였다. 일본군들은 가망이 없는 전쟁에서 철수하려 하였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본국으로의 철수를 금지해 남해안에 왜성들을 짓고 수비에 들어갔다. 다음 해 8월 도요토미(豊臣秀吉)가 병사하자, 왜군은 순천, 사천 울산 등지로 집결하면서 철수작전을 서둘렀다. 

     이 소식을 접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왜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왜교(倭橋)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 고니시(小西行長)의 부대를 섬멸하기 위해 명나라 수군도독(水軍都督) 진린과 함께 1598년 9월 고금도(古今島) 진영을 떠나 노량 근해에 이르렀고 명나라 육군장 유정과 수륙합동작전을 펼쳤다. 

     그 때 고니시는 수륙 양면으로 위협을 받게 되자 이순신과 진린에게 뇌물을 바쳐 통신선만이라도 다닐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이순신은 뇌물을 가져온 사신을 죽이려다 참고 돌려보냈지만 진린은 고니시가 마지막으로 요청한 통신선 1척의 통과를 허용했다. 고니시는 통신선으로 사천(泗川) 등지의 시마즈(島津義弘)와 연락해 남해·부산 등지에 있는 왜군 수군의 도움을 받아 조·명 연합수군을 협공하면서 퇴각하려는 생각이었다. 

 

 

 

전개

     11월 18일 밤 이순신의 예견대로 노량과 왜교 등지에는 수군 6만여 명과 500여 척의 왜선이 집결했다. 그러나 시마즈 함대가 노량을 통과할 것을 예측한 이순신은 명 수군도독 진린으로 하여금 남해도 서북쪽 죽도 뒤편에서 일본 수군의 퇴로를 차단해 줄 것을 요청하고, 조선 수군은 오후 10시경 남해도 서북단인 관음포에 매복시켰다. 200여 척의 조·명 연합수군을 거느린 이순신은 “이 원수만 무찌른다면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此讎若除死則無憾)”고 하늘에 빌고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19일 새벽 4시경, 요시히로 등이 이끄는 일본 함선 500여 척이 노량에 진입하자 매복해 있던 조선 수군은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순신 함대가 적선 50여 척을 격파하고, 진린의 명 수군이 합세하여 조명 연합수군의 함선과 적선이 뒤엉켜 혼란한 상황에서 4시간여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같은 날 오전 8시경, 전투는 막바지에 이르러 왜의 수군 선박 200여척이 불에 타 침몰하고 150여 척이 파손되었으며, 패색이 짙어진 일본 수군은 150여 척의 잔선을 이끌고 포위망을 돌파하려 시도했다. 조명 연합함대는 잔적을 소탕하며 추격을 계속하였다. 이순신은 관음포(觀音浦)로 도주하는 마지막 왜군을 추격하던 중 총탄을 맞고 쓰러지면서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愼勿言我死).

 

하고 전사하였다. 송희립은 그의 죽음을 숨기고 계속하여 북을 치면서 명령에 따라 싸움을 독려하였다. 전투가 끝난 후 이순신의 죽음을 듣고 통곡소리가 가득했다. 이 해전에서 가리포첨사 이영남(李英男), 낙안군수 방덕룡(方德龍), 초계군수 이언량 등이 전사하였고 명나라 장수 등자룡(鄧子龍) 역시 추격 도중 전사하였다. 이때 도주하던 150여 척의 일본 함선중 100여 척을 나포하여 겨우 50여 척의 패전선만이 도주했다. 한편, 순천 왜교에서 봉쇄당하고 있던 고니시의 군사들은 남해도 남쪽을 지나 퇴각해 시마즈의 군과 함께 부산에 집결, 그 즉시 퇴각하였다. 

 

 

 

결과

     노량 대첩을 끝으로 정유재란은 막을 내렸고, 임진년에 시작된 7년간의 긴 전쟁도 끝이났다. 노량 대첩은 임진왜란 시기 전투 중 가장 큰 전과를 거둔 전투였고 조명 연합 작전 중 유일하게 성공을 거둔 해전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 숙종 때 예조판서였던 조상우(趙相愚)는 임진왜란 3대첩 중 첫 번째로 이순신의 노량 대첩을 꼽기도 하였다. 이긍익(李肯翊)도 임진왜란 3대첩에 노량전투를 포함하였다. 영국의 발라드(G.A.Ballard) 제독은 ‘조선의 트라팔가(Trafalgar) 해전’이라고 평가하였다. 노량 대첩의 승리로 조선 수군의 막강 전력이 해외에 전파되는 효과를 주었으며, 당대 조선 조정에 이순신과 조선 수군의 능력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순신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는 관원을 보내 조의를 표하고 우의정에 추증하였다. 1604년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었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643년 충무라는 시호를 받았고, 1793년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다. 

 

이순신장군의 전승지 지도그림
이순신장군 전승지 지도 출처-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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