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촌 사회의 변화
사족의 향촌 지배 체제 확립
조선의 향촌사회는 사족(유력 양반)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사족은 유향소에서 지방관을 보좌하였으며, 수령도 관할 지역을 원활히 다스리기 위해 향촌 사족의 도움을 받았다. 사족은 향안을 만들고 향회를 열어 결속을 다졌으며, 향촌의 유력 세력으로 행세하면서 지방관과 향리를 견제하였다. 이에 정부는 유향소를 활용해 향천의 자치를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한편, 한성에 경재소를 설치하여 현직 중앙 관료에게 연고지의 유향소를 통제하게 하였다.
15세기말 사림 세력이 성장하면서 각 지방에 서원이 세워지고 향약이 보급되었다. 지방 사족은 서원을 중심으로 학문적 기반을 마련해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하고 권위를 높였다. 또한 전통적인 공동 조직과 미풍양속을 유교식으로 고친 규약인 향약을 주도하여 향촌의 질서를 유지하고 농민을 교화시키는 등 사족을 중심으로 하는 향촌 지배 체제를 확립하였다. 서원과 향약의 확대로 향촌에서 여론을 주도하는 산림이 형성되었고 사족에 의한 향촌 지배 체제가 더욱 견고해졌다. 한편, 사족들은 집안에 가묘를 세워 제사 지내고 족보를 편찬하였다. 이들은 ⌜주자가례⌟의 보급에 힘써 향촌에 성리학적 윤리를 확산하려 하였다.
향촌 지배 체제의 변화
양 난을 거치면서 향촌 사회의 질서가 크게 흔들렸다. 이에 정부는 이웃하고 있는 다섯 집을 통수라는 관리자가 관장하게 하는 오가 작통법을 강화하여 향촌을 통제하려 하였다.
지방 사족도 더 많은 서원과 사우를 세우고 동족 마을을 형성하여 친족 간의 결속을 강화하거나, 촌락 단위로 동약을 실시하여 향촌에서 권위를 유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양반 수가 증가하고, 경제적으로 몰락하는 양반이 늘어나면서 향촌 사회에서 사족의 권위는 점점 떨어졌다. 조선 후기 경제적으로 성장한 일부 부농층은 지방관과 결탁하여 향안에 이름을 올리고 향회를 장악하는 등 사족의 향촌 지배에 도전하였다. 이처럼 새롭게 성장한 세력을 신향, 기존 양반을 구향이라고 하였다.
신향과 구향이 향회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대립하면서 향전이 발생하였다. 지방관은 재정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신향을 지원하였다. 이 과정에서 구향이 약화되었으나 신향은 향촌 사회를 완전하게 장악하지 못하였고, 구향의 저항으로 향촌 지배에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아 오히려 수령의 권한이 강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앙 정부는 지방관과 향리를 통해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 하였다. 사족의 이익을 대변하였던 향회는 점차 지방관을 견제하는 기능을 잃고, 세금을 부과할 때 의견을 묻는 자문 기구로 역할이 축소되었다. 이는 세도 정치 시기에 수령과 향리의 농민 수탈이 심해지는 배경이 되었다.
한편, 향촌에서 양반의 권위가 약화되자 양반들은 동족 마을을 형성하고 동 단위의 자치 조직인 동약 등을 시행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려 하였다.
부계 중심의 가족 제도 강화
조선 전기에는 고려와 마찬가지로 가족 제도에서 부계와 모계가 모두 중시되었다. 일반적으로 재산 상속은 고르게 이루어졌으며 제사도 돌아가면서 지내거나 분담하여 담당하였다.
양 난 이후 성리학적 지배 질서가 강화되면서 점차 부계 중심의 가족 제도가 강화되었다. 재산 상속과 제사는 장자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아들이 없으면 양자를 들여 가문을 잇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또한, 조선 후기에는 성리학적 윤리가 강조되면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점차 낮아졌다. 조선 전기에는 혼인을 하면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일정 기간 동안 생활하고는 하였으나, 조선 후기에는 혼인을 하면 신부가 곧장 신랑 집으로 가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또한 이혼한 여성의 재혼도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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