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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조선 후기에 이르러 농민들은 모판에 모를 미리 길러서 논에 옮겨 심는 모대기법을 적극 도입하였다. 그러자 정부는 모내기 철에 가뭄이 들면 한 해 농사를 망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모내기법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다. 정부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모내기법을 실시하면 수확량이 크게 늘었기 때문에 모내기법은 더욱 확산되었다. 

 

썸네일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수취 체제 정비

     16세기 들어 조세 제도가 무너지면서 조선의 국가 재정이 악화되었다. 더구나 왜란과 호란으로 인구가 줄어들고 경작지는 황폐해졌으며, 농민의 생활도 매우 어려워졌다. 정부는 수취 체제를 개편하여 농천 사회를 안정시키고 재정 수입을 늘리려 하였다. 

     전세는 병자호란 이전부터 영정법을 시행하여 풍년과 흉년에 관계없이 토지 1결당 4~6두로 고정시켰다. 한편 정부는 국가 재정을 확보하고, 방납 등에 따른 농민 부담을 줄이기 위해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대동법으로 집집마다 토산물로 내던 공물을 토지 면적에 따라 쌀, 옷감, 동전 등으로 납부하게 되었다. 대동법의 실시로 국가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어용상인인 공인이 등장하였고, 이들의 활동은 상품 화폐 경제 발달에 영향을 끼쳤다. 

     군포 역시 농민에게 큰 부담이었다. 정부는 오랜 논의 끝에 균역법을 실시하여 농민이 부담하는 군포 2~3필을 전국적으로 균등하게 1필로 줄였다. 부족한 재정 수입은 결작이라 하여 토지에 부과하거나 일부 부유한 양민에게 선무군관포를 내게 하여 보충하였다. 

 

 

 

 

농촌경제의 변화 및 농민층의 분화

     조선은 농업을 국가 경제의 근본으로 삼아 건국 초부터 농업을 장려하고 경작지를 늘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세종 때에는 농민의 실제 경험과 우리나라의 풍토에 맞는 농사법을 정리하여 ⌜농사직설⌟을 간행하였다.

     17세기 이후 양 난의 피해를 극복하기 위하여 정부가 개간 사업을 적극 장려하면서 경지 면적이 빠르게 회복되었다. 농민 역시 농경지를 확대하고 농법을 개량하여 생산량을 늘렸다.

     특히 논농사에서 모내기법(이양법)이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다. 이에 따라 수리 시설이 크게 늘고 두레의 의한 공동 노동 방식이 보편화되었다. 모내기법으로 김매는 일손을 덜고 단위 면적당 수확량은 배로 늘였으며, 벼와 보리의 이모작도 가능해졌다. 밭농사에서는 이랑을 만든 후 생긴 고랑에 씨를 뿌리는 견종법이 일반화되어 수확량이 크게 늘었다.

     농법의 개량으로 노동력이 절감되면서 한 사람이 농사지을 수 있는 경작지의 규모가 켜졌다. 또한, 도시 인구가 증가하고 상품 유통이 활발해지면서 인삼, 면화, 담배, 채소 등 상품 작물의 재배가 확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부 농민은 부농층으로 성장하였지만, 많은 농민은 부세와 고리대의 부담 등으로 경작지를 잃고 임노동자가 되는 농민도 늘어났다. 지주와 소작농의 관계도 점차 신분적 종속관계에서 경제적 계약 관계로 변화하였다. 

 

 

 

 

수공업과 광업의 변화

     조선 후기에는 관영 수공업이 쇠퇴하고 민영 수공업이 발달하였다. 민영 수공업자는 규모가 크지 않아 상인에게 자본과 원료를 미리 빌려 물건을 생산하는 경우가 많았다(선대제 수공업). 임노동자를 고용한 공장제 수공업도 널리 펴졌다. 

     민영 수공업이 발달하면서 주요 원료인 광물의 수요도 커졌다. 광물은 본래 정부가 백성을 동원해 채굴하였으나, 점차 백성을 동원하기 어려워지면서 세금을 받고 민간 업자에게 채굴을 허용하였고 은광 개발이 활발해졌다. 

     광산 개발이 활기를 띠면서 몰래 광산을 개발하는 잠채도 성행하였다. 광산은 주로 덕대라는 광산 경영인이 상인에게 자본을 조달하여 채굴업자와 노동자를 고용하는 형태로 운영되었다.

 

 

 

   

상업의 발달과 공인・사상의 성장

     조선 초 국가 주도로 운영되었단 상업은 조선 후기에는 농업 생산력이 향상되고 수공업 생산이 활발해지면서 민간 주도로 변화하며 상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대동법의 실시로 등장한 공인은 국가에 물품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자본을 축적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공업 생산을 촉진하였고 장시가 활성화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5일마다 열리는 장시가 전국에 1,000여 곳에 이르렀다. 보부상은 지방 장시를 무대로 활발하게 상업 활동을 펼쳐, 생산자와 소비자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며 각 장시를 유통망으로 묶었다.

     상품 교역량이 크게 늘면서 교통 요지와 포구에 있던 일부 장시는 상설 시장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포구는 조세와 상품을 운반하는 주요 통로로 크게 발전하였으며, 경강상인 등 선상의 활동으로 하나의 유통망으로 연결되어 갔다. 

     사상도 성장하였다. 이들은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도성 안까지 진출하여 활발한 상업 활동을 펼쳤다. 도성 안의 상업을 독점해 왔던 시전 상인은 정부에서 금난전권을 부여받아 사상의 활동을 억압하였다. 그러나 사상은 자유로운 상행위를 요구하면서 금난전권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결국 정부는 통공 정책을 실시하여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폐지하였다.

     금난전권이 폐지된 뒤 사상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져 한성의 경강상인, 개성의 송상, 평양의 유상, 의주의 만상, 동래의 내상 등이 성장하였다. 이들 사상은 전국을 상대로 활동하면서 공인과 함께 독점적 도매상인 도고로 성장하였다. 한편 규모가 큰 장시와 포구에서는 객주여각 등이 상인이 등장하여 운송업, 숙박업, 금융업 등에 종사하였다. 

 

 

 

 

대외 무역의 발달

     국내 상업이 크게 발달하면서 중국, 일본과의 무역도 활기를 띠었다. 17세기 이후 국경 지역에서는 무역을 위한 시장이 열렸고 개시(공무역)와 후시(사무역)가 이루어졌다. 상인들은 사신 왕래에 동행하여 무역을 하였다. 

     청과의 무역은 의주의 중강과 중국의 봉황성의 책문 등 국경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일본과의 무역은 17세기 양국 관계가 정상화된 이후 동래의 왜관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조선은 청에 금, 은, 인삼 등을 수출하였고, 청에서 비단, 약재, 문방구 등을 수입하였다. 일본에는 인삼, 쌀, 무명 등을 수출하였고, 일본으로부터 은, 구리, 후추 등을 수입하고, 청에서 수입한 물품을 중계하기도 하였다. 특히 17세기에는 중국의 비단과 조선의 인삼, 일본의 은이 집중적으로 교역되면서 조선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은 유통이 활성화되었다. 

     한편 후시 무역이 확대되면서 청과의 무역에 관여한 만상, 일본과의 무역에 종사한 내상, 이들을 연결한 송상 등이 큰 부를 축적하였다.

 

 

 

 

화폐 유통의 확대

     조선 후기에는 국내의 상업 경제가 발달하고 상품 유통이 활발해지면서 금속 화폐의 수요가 늘어났다. 숙종 이후 상평통보가 주조되어 전국적으로 유통되었고, 대동법 실시로 세금과 지대를 동전으로 낼 수 있게 되어 화폐 유통이 더욱 활성화되었다. 

     화폐 유통이 활발해지자 양반, 상인, 지주는 화폐를 유통 수단이 아닌 고리대나 재산 축적 수단으로 삼아 많은 양을 보관하였다. 이에 시중에 동전이 크게 부족한 전황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또한 화폐를 몰래 주조하여 사용하는 사례도 많았다. 한편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대규모 거래에서는 어음, 환 등 신용 화폐도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