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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사림 세력의 대두와 정치 운영의 변화

사림이 성장하고 공론 정치가 이루어지다

 

조선 중종 때 관리가 된 조광조는 급진적인 개혁 정치를 펼쳐 실권을 지내고 있던 훈구의 반발을 샀다. 이와 관련해 훈구가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씨를 써 두고 벌레가 갉아먹게 하여 조광조와 사림을 모함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결국 조광조와 사림은 역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받아 중앙 정계에서 제거되었다.

 

썸네일 사림 세력의 대두와 정치 운영의 변화
사림 세력의 대두와 정치 운영의 변화

 

새로운 정치 세력 사림의 등장

     신진 사대부 중 일부는 조선 건국 이후에도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지방에서 성리학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썼고 정몽주, 길재 등의 학통을 이어갔다. 이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림은 15세기 후반 중앙 정치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였다. 

     당시 성종은 세조 때부터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세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공훈을 세운 세력)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을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3사 언론 기관에 중용하면서 훈구와 사림은 한동안 세력 균형을 이루었다. 사림이 도덕과 의리를 바탕으로 하는 왕도 정치와 향촌 자치를 추구하며 훈구의 부정과 비리를 비판하자 두 세력의 대립은 깊어졌다.

 

 

 

 

사화의 발생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훈구 세력은 사림 세력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는 사림 세력을 못마땅하게 여긴 연산군도 이에 동조하였다. 연산군과 훈구는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문제 삼아 사림을 몰아냈다(무오사화). 이어 연산군은 생모의 폐위와 관련된 훈구와 사림 세력을 제거하였다(갑자사화). 결국 두 차례에 걸친 사화('사림이 입은 화'의 준말)가 일어나 사림 세력은 큰 피해를 입었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쫓겨나고 중종이 즉위하자, 이 과정에서 공을 세운 훈구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에 중종은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을 등용하여 훈구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조광조는 유교적 도덕 정치의 시행을 주장하며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현량과를 실시하여 사림을 등용하였고, 중종반정의 공신을 조사하여 자격이 없는 사람의 공훈을 삭제하였다. 공신들은 이에 반발하였으며 중종도 조광조의 급격한 개혁에 부담을 느꼈다. 결국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은 다시 사화를 맞았다(기묘사화).

     사림 세력은 명종 때에도 외척 간에 권력 갈등이 일어나 사화를 겪었으나(을사사화), 서원향약을 기반으로 향촌 사회에서 꾸준히 세력을 확대하여 선조 대에는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붕당의 등장과 공론 정치

     사림이 정국을 주도하며 척신 정치의 잔재 청산과 관리 인사권을 맞고 있는 이조 정랑 임명 문제로 사림 사이에서 대립이 일어났다. 결국 신진 사림을 중심으로 한 동인과 기성 사림을 중심으로 한 서인으로 사림 세력이 갈라지며 붕당이 형성되었다. 이후 동인은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나뉘었다. 

     붕당의 형성에는 정치적 입장의 차이와 함께 학문적 의견이나 출신 지역의 차이가 영향을 미쳤다. 동인은 척신 정치를 철저히 청산할 것과 정치의 도덕성을 강조하였으며, 주로 서경덕과 이황, 조식의 학문을 계승하였다. 반면, 서인은 척신이라도 믿을 만한 인물과는 함께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주로 이이와 성흔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하였다. 

     광해군 때에는 북인이 집권하면서 서인과 남인을 배제하고 권력을 독점하였다. 인조반정 이후에는 서인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고 남인과 공존하면서 공론에 따른 정치를 추구하였다. 중앙에서는 3사의 관리들이 공론 형성을 이끌었고, 재야의 산림들은 서원 활동과 상소 등을 통해 공론을 모았다. 붕당들은 서로 다른 공론을 내세워 국정을 주도하려 하였기 때문에 각 붕당의 공론에 따라 정치에 대한 입장 차이가 나타났다. 이 시기 붕당 정치는 붕당 간 정치적 입장과 학문적 견해를 인정하여 상호 비판과 견제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운영되었다. 

 

 

 

 

붕당 정치의 변질

     붕당 정치는 지방 사족의 의견까지 공론으로 폭넓게 수렴하고, 붕당 간에 비판과 견제가 가능하다는 긍정적인 면이 있었다. 그러나 붕당 간의 권력 다툼이 심해지면서, 붕당 정치의 성격이 점차 변질되었다. 

         현종 때 궁중 의례인 상복 입는 기간을 놓고 두 차례에 걸쳐 예송이 일어나면서 붕당(서인과 남인) 간 대립이 심화되었다. 숙종 때에는 잦은 환국으로 서인과 남인이 번갈아 권력을 장악하면서 상대 붕당에 대한 탄압과 보복이 이어졌다. 결국 각 붕당은 상대 붕당을 인정하지 않고 권력을 독점하려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다. 공론은 붕당의 이익을 대변하는 데 이용되었다. 붕당 간 대립으로 왕권이 위협받자 숙종 대에 탕평책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제대로 실시하지 못하였다.

 

 

 

 

영조의 탕평책

     붕당 간의 세력 균형이 무너져 정치가 불안해지자 영조는 국왕이 중심에 서서 정치 세력 간의 균형을 유지하는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탕평론에 동의하는 탕평파를 육성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였고, 붕당의 뿌리를 없애기 위해 재야에서 공론을 주도하던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붕당의 근원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고, 3사의 관리를 추천하는 관행을 없애 이조 전랑의 권한을 약화시켰다.

     영조는 균역법을 시행하여 백성의 군역 부담을 덜어 주었고, 가혹한 형벌을 금지하였다. ⌜속대전⌟, ⌜동국문헌비고⌟ 등도 편찬하여 문물제도를 정비하였다.

 

정조의 개혁 정치

     영조 통치 후반에 외척의 힘이 강해지자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외척 세력을 억누르고 붕당에 관계없이 능력 있는 노론, 소론, 남인을 고루 등용하였다. 또한 규장각을 설치하여 정책을 뒷받침하는 기구로 삼았고, 관리를 재교육하는 초계 문신제를 시행하여 개혁 세력을 육성하여 왕권을 뒷받침하게 하였다. 또한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여 왕권을 뒷받침하고,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도시로 수원 화성을 세웠다.

     한편, 정조는 상업 발달과 민생의 안정에도 힘을 기울였다. 시전 상인의 특권을 축소하여 사상들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보장하였다. 서얼 출신 학자를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하였으며, 문화 발전과 학문 장려를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대전통편⌟을 편찬하여 법령을 정비하였다. 

 

 

 

 

세도 정치의 전개

     영조와 정조대의 탕평책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추진되어 정치권력이 왕과 소수의 정치 집단에게 집중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정조가 갑작스럽게 죽고 나이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은 일부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 정치가 나타났다. 

     세도 정치는 순조, 헌종, 철종의 3대 60여 년 동안 이어졌고 이 시기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이 권력을 행사하였다. 세도 가문은 비변사를 비롯한 주요 관직을 독점하였고, 여러 군영의 지휘권을 장악하여 정권 유지의 기반으로 삼았다. 이로 인해 왕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 시기 정치 기강이 크게 문란해져 과거제 운영과 관직 임명 과정에서도 비리가 나타났다. 과거 시험에서의 부정이 극심하였고, 관직을 뇌물로 파는 일이 흔하게 일어났다. 돈을 주고 관직을 산 관리들이 이를 보상받고자 백성을 가혹하게 수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