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한국사

[한국사] 조선의 성립

조선의 건국과 유교 정치의 확립

 

조선 시대의 사람들은 지금의 주민 등록증처럼 신분을 증명하는 호패를 지니고 다녔다. 호패는 16세 이상의 모든 양인 남자에게 발급하였고, 호패에는 주인의 이름과 출생 연도, 과거 급제사실, 직위 등의 정보를 적었다. 조선 정부는 호패를 세금을 거두거나 군사를 징발하는 등 통치에 활용하였다. 

 

썸네일 조선의 성립괴 통치체제 정비
조선의 성립과 통치 체제의 정비

 

고려 말 사회 혼란 지속

     14세기 중엽 중국에서는 원이 쇠퇴하며 한족 농민 반란군(홍건적)이 일어났다. 주원장은 홍건적을 이끌고 원을 만리장성 밖으로 몰아내는 한편, 명을 건국하였다. 일본에서는 막부의 통제력이 약해지면서 왜구가 더욱 기승을 부렸다. 

     고려도 큰 혼란을 겪었다. 권문세족과 불교 사원이 농장을 확대하면서 백성을 수탈하였고, 홍건적과 왜구도 침입해 왔다. 이에 신진 사대부는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물리치면서 성장한 신흥 무인 세력과 손잡고 고려를 개혁하려 하였다. 

 

 

 

 

조선의 건국

     새로 건국된 명이 청렬 이북의 땅을 요구하자 고려는 요동 정벌을 추진하였다. 요동 정벌을 반대하던 이성계는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개경으로 돌아와 실권을 장악하였다(위화도 회군. 1388).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는 과전법을 시행하여 신진 관료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는 등 개혁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신진 사대부는 현실 인식 및 개혁 방법의 차이로 급진 개혁파와 온건 개혁파로 분열하였다. 정도전, 조준 등 급진 개혁파는 이성계와 손잡고 조선을 건국하였다(1392).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고,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국가 기틀의 확립

     조선은 민본 사상과 덕치주의를 내세우면서 성리학 이념을 바탕으로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태조 때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을 편찬하여 종합적 통치 규범을 제시하고, 재상 중심의 정치를 주장하였다. 정도전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태종은 6조 직계제를 실시하여 공신과 왕족들이 소유한 사병을 없애고 재상의 권한을 약화하여 왕을 중심으로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또한 양전 사업과 호패법을 실시하여 국가 재정을 늘렸다. 

     태종을 이은 세종은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하여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꾀하였으며, 강화된 왕권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이상적인 유교 정치를 이루고자 하였다. 국왕과 관리들이 함께 학문을 토론하는 경연 제도를 활성화하고, 집현전을 설치하여 관리들의 학문 연구를 장려하였다. 세종은 유교의 덕치와 민본 사상을 바탕으로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각종 편찬 사업 등을 이루었다.

     세조는 정변으로 왕위에 오른 후 집현전과 경연 제도를 없애 언론 활동을 제한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통치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각종 법전과 명령들을 종합한 ⌜경국대전⌟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성종은 집현전을 계승한 홍문관을 설치하여 경연을 활성화하였다. 또한 ⌜경국대전⌟이 완성・반포되면서 성문 법전에 바탕을 둔 조선의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통치 체제 정비

정치 제도

     조선은 중앙 집권 체제를 지향하면서도 권력을 독점을 막는 통치 체제를 마련하였다. 중앙 정치 체제는 재상들의 합의로 정책을 심의・결정하면 국정을 총괄하는 의정부6조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6조는 직능에 따라 정책과 행정을 나누어 맡아 행정의 전문성과 효율성을 높였다. 조선 초에는 정국의 변화에 따라 6조 직계제를 시행하거나 의정부 서사제를 시행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3사를 두어 정사를 비판하고 관리의 비위를 감찰하게 하여 권력의 독점과 부정을 방지하였다. 고려에 비해 국왕의 명령이나 관직 임명에 개입하는 권한이 축소된 대신 사간원을 언론 전담 기구로 독립시켰다. 3사의 언론 활동은 권력의 독점과 부정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고관은 물론 국왕도 함부로 막을 수 없었다. 한편, 국왕의 비서 기구인 승정원과 국가의 중죄인을 다스리는 의금부가 있었다. 

     한편 과거, 천거, 음서 등 다양한 방법으로 관리를 선발하였다. 과거는 문과・무과・잡과로 운영하였고 그중에서 문관을 뽑는 문과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으며, 무관을 뽑는 무과도 정기적으로 실시하였다. 잡과는 해당 관청에서 별도로 실시하였다. 천거와 음서는 고려 시대에 비해 대상과 범위가 크게 줄었고, 고위직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문과에 합격하여야 했다. 교육 제도는 관리 선발 제도와 연결하여 운영하였으며, 주로 문관 양성을 위한 유학 교육을 강조하였다. 중앙에 성균관과 4부 학당을 두고, 지방에는 향교를 세웠다. 

 

행정 제도

     조선은 지방 행정 제도를 정비하여 국왕의 권력이 직접 백성에게 미칠 수 있도록 하였다. 지방 행정 조직은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밑에 부・목・군・현을 두었다. 각 도에는 관찰사를 파견하였고, 또한 특수 행정 구역이었던 향・부곡・소를 일반 군현으로 승격하거나 주변 군현에 통합하고, 모든 군현에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수령의 권한이 강화되어 지방의 행정・사법・군사 업무를 담당하였으며, 향리는 수령을 보좌하는 아전으로 지위가 떨어졌다. 한편 각 지방의 사족은 향촌 자치 조직인 유향소를 운영하여 수령을 보좌하고 백성을 교화하였으며 향리를 감찰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지방 제도의 정비가 이루어지면서 중앙과 지방의 일원적 통치 체제가 강화되었다. 

 

군사 제도

     군사 제도는 양인 남성으로서 현역 군인으로 복무하는 정군과 정군의 비용을 부담하는 보인으로 편성하였다. 중앙군인 5위는 궁궐과 수도를 방위하였고, 지방 군은 국방상 중요한 지역인 영과 진을 지키며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의 지휘를 받았다. 조선 초에는 잡색군을 두어 평상시에는 생업에 종사하다가 유사시에 군사로 동원하였다. 

 

교통・통신 제도

     조선은 교통・통신 제도도 정비하였다. 국경의 상황을 중앙에 신속히 알리기 위해 봉수제를 정비하고, 공문 전달과 공물 수송을 위한 역참제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조운제를 운영하여 조세를 한성으로 운송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