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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개화 정책의 추진 및 반발

개화 정책의 추진 및 갈등

고종은 수신사 파견 전에 김기수를 만나 '들을 만한 모든 일은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반드시 기록해 오라.'라고 거듭 당부하였다고 한다. 일본에 도착한 수신사 일행은 일본의 주요 인사를 만나고 근대 시설을 살펴본 후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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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 정책의 추진 및 반발

 

개화 정책의 추진

     조선은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일본에 수신사를 파견하여 일본과 세계의 정세를 파악하려 하였다. 근대화에 필요한 기술과 정보를 조사하기 위한 제1차 수신사 김기수 일행은 일본의 근대시설을 시찰하였다(1876). 하지만 개항에 대한 반대 여론으로 제1차 수신사를 파견한 이후 4년 만에야 김홍집을 대표로 하는 제2차 수신사를 파견하였다. 일본과의 조약 개정을 위해 파견된 제2차 수신사 김홍집 일행은 목적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일본의 발전상을 살펴보고 돌아왔다(1880).

     이어 정부는 이들의 시찰 의견을 바탁으로 대외 관계의 변화에 대응하고 근대 문물을 수용하기 위해 관제를 개편하여 개화 업무를 총괄할 기구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그 아래 12사를 두어 사무를 나누어 맡게 하였다. 그리고 국방력 강화를 위해 일본인 교관의 훈련을 받는 신식 군대인 별기군(교련병대)을 창설하여 근대식 군대를 양성하였고, 군제를 개편하여 기존의 5군영을 무위영・정어영의 2영으로 축소하였다.

     또한, 1881년에 박정양, 어윤중, 홍영식 등의 관료들을 비밀리에 조사 시찰단으로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의 제도와 법률, 각 부의 사무 및 세관, 군사 등에 관한 일을 세밀하게 조사하게 하였다. 이와 더불어 정부는 김윤식을 영선사로 임명하여 중인 자제들을 이끌고 청에 가서 근대식 무기・화약・기계 제조 기술과 군사 훈련법을 배워 오도록 하였다. 정부의 재정 부족으로 인원이 줄고 임오군란이 일어나면서 이들은 일찍 돌아오게 되었으나 이를 계기로 기기창이 설치되었고, 이들의 보고서는 이후 정부가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 정부는 미국과 수교한 이후 미국에 답례 사절단을 파견하여 근대 시설을 살펴보게 하였다(1883).

 

 

 

 

유생들의 위정척사 운동

     19세기 후반 천주교가 확산되고 서구 열강의 토상 수교 요구가 거세졌다. 보수적인 유생들은 이를 기존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것으로 여겨 성리학적 사회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위정척사 운동을 벌였다. 

     1860년대 이항로와 기정진 등은 열강의 통상 요구와 침략에 맞서 싸우자는 척화 주전론을 주장하여 흥선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뒷받침하였다. 1870년대 일본이 개항을 요구하자, 최익현은 왜양일체론을 주장하며 개항을 반대하였다.

     1880년대에는 조선 정부가 개화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정부의 개화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던 위정척사 세력은 ⌜조선책략⌟의 유포를 계기로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다. 이만손의 주도로 영남의 유생들이 만인소를 올려 정부의 개화 정책 및 미국과의 수교에 반대하였다. 이러한 개화 반대운동은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다. 이에 고종은 '적사윤음'을 내려 유생들을 달랬다. 

     하지만 정부가 홍재학의 상소를 계기로 위정척사 운동을 탄압하는 등 개화를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위정척사 운동은 점차 약화되었다. 이후 반외세・반침략의 성격을 띤 위정척사 운동은 1890년대 항일 의병 운동으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양반 중심의 성리학적 질서룰 유지하려 했다는 한계를 지녔다. 

 

 

 

 

임오군란

     개항과 개화 정책은 민중의 삶에도 영향을 끼쳤다. 정부의 재정 지출이 늘어 백성의 세금 부담이 커졌고, 일본과의 무역으로 쌀이 빠져나가고 흉년까지 겹쳐 쌀값이 폭등하였다. 이에 도시 빈민을 중심으로 정부와 일본을 향한 반감이 커졌다.

     한편 별기군의 설치로 5군영이 2영으로 축소되면서 많은 구식 군인이 일자리를 잃었다. 남아 있던 구식 군인들도 별기군보다 열악한 대우를 받아 불만이 높았다. 또한, 집권층의 부정부패로 구식 군인들에게 오랫동안 급료가 지급되지 않았고, 13개월 만에 급료로 지급된 쌀에는 겨와 모래가 섞여 있었다. 이를 계기로 누적된 불만이 폭발한 구식 군인들이 봉기하였다(임오군란, 1882).

     구식 군인들은 고관의 집을 습격하고, 별기군의 일본인 교관을 살해하였으며, 일본 공사관을 공격하였다. 여기에 한성 주변의 도시 빈민들도 봉기에 가세하면서 군란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다음날 임오군란 세력이 궁궐을 습격하여 민씨 일파를 처단하고 민씨 일파의 배후 인물로 지목된 왕비를 찾았으나 왕비는 이미 피신한 상황이었다. 고종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흥선 대원군에게 정권을 맡겼다. 흥선 대원군은 통리기무아문과 별기군을 폐지하고, 5군영을 부활하는 등 개화 정책을 중단하였다. 그리고 매점매석으로 쌀값을 폭등시켰던 시전 상인 등을 처형하여 민중의 불만을 무마하려 하였다. 

 

 

 

 

청의 내정 간섭

     임오군란 소식은 청과 일본에도 알려졌다. 민씨 세력의 요청을 받은 청은 군대를 파견하여 흥선 대원군을 군란의 책임자로 지목하여 납치하고 난을 진압하였다. 이후 청은 조선에 군대를 주둔하고, 마젠창과 묄렌도르프를 고문으로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간섭하였다. 또한,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을 맺어 양화진과 한성을 개방하게 하고 청 상인의 이권을 인정받는 등 경제적 침투를 강화하였다.

     한편 일본은 인천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고, 임오군란 당시 일본 공사관이 습격받은 일을 구실로 조선을 압박하여 제물포 조약의 체결을 강요하였다. 이 조약으로 조선은 일본에 배상금을 지불할 것을 약속하고 일본 공사관 경비를 위한 군대의 한성 주둔을 인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