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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한국사] 서구 열강의 침략과 대응

서구의 침략에 맞서다

 

서울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강화도 초지진은 19세기 후반 미국, 일본과 격전을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다. 초지진에는 포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400여 년 된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이 포탄 자국은 1871년 미국 해군이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며 초지진에 포격을 가하였을 당시에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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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열강의 침략과 대응

 

천주교 박해와 제너럴 셔먼호 사건

     제2차 아편 전쟁으로 베이징이 서구 열강에 함락되자 조선의 위기감이 높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연해주를 얻어 조선과 국경을 접하게 된 러시아가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였다.

     흥선 대원군은 국내에 있던 프랑스 신부를 통해 프랑스와 접촉하여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의 위협에 대한 불안감이 약해지고, 청이 천주교를 탄압한다는 소식과 천주교를 금지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흥선 대원군은 천주교 탄압에 나섰다. 그 결과 9명의 프랑스 신부를 비롯해 많은 천주교도가 처형되었다(병인박해, 1866).

     프랑스 함대가 보복하러 올 것이라는 소문이 퍼진 가운데 1866년 7월 무장한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진출하여 교역을 요구하며 난동을 부렸다. 당시 평안도 관찰사였던 박규수는 제너럴 셔먼호에 식량, 땔감 등을 제공하며 물러가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선원들은 조선의 관리를 감금하고 횡포를 부렸다. 이에 분개한 평양 주민은 관군과 함께 배를 불살라 침몰시켰다(제너럴 셔먼호 사건).

 

 

 

 

병인양요

     프랑스는 병인박해로 자국 신부가 처형된 것을 구실로 극동 함대의 로즈 제독을 보내 조선의 문호 개방을 요구하며 강화도를 공격하였다(병인양요, 1866). 프랑스군은 갑곶진에 상륙한 뒤 강화부를 점령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조선인을 살해하였다. 조선에서 이를 문제 삼자 프랑스군은 병인박해 책임자 처벌과 통상 조약 체결을 요구하였다. 

     조선은 프랑스의 요구를 거부하고 강화도 수복에 나섰다. 문수산성에서 한성근 부대가 전투를 벌였고,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이 정족산성(삼랑성)에서 프랑스군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자, 사상자가 생긴 프랑스군은 강화도에서 물러났다. 프랑스군은 퇴각하면서 강화도의 주요 시설을 파괴하고 외규장각에 보관하고 있던 의궤를 비롯한 도서와 은괴 등 약탈한 각종 물품을 가지고 철수하였다. 

     프랑스군 철수 이후 조선은 천주교도가 내부에서 호응한다고 판단해 철저히 수색하고 처벌하였다. 그리고 서양인이 교역을 청하는 것은 조선인이 서양 물품을 사용하기 때문이라며, 서양 물품을 교역하다 적발되는 자는 사형에 처하였다. 

 

 

 

 

군사력 강화

     병인양요 이후 흥선 대원군은 본격적으로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우선 프랑스군과의 격전지이자 한성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강화도의 군비 증강에 나섰다. 강화도에 있는 군영인 진무영의 위상을 높이고 조총병인 포군을 배치하였으며, 무기와 전함도 수리하였다. 1868년에 오페르트가 프랑스 선교사, 미국 자본가의 지원을 받아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것을 계기로 전국 각 지방에도 포군을 본격적으로 배치하였다.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려는 시도도 이루어졌다. 중국에서 간행된 서적을 참고해 수뢰포를 제작하여 시험하고, 각종 화포도 개발하였다. 군비 조달을 위해 한성에서 통행세를 징수하고, 경복궁 공사가 끝난 후에도 원납전을 계속 거두었다. 

 

 

 

 

신미양요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한 해명을 듣고, 조난 선원 구호 문제를 협의 하기 위해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1871년 베이징 주재 미국 공사는 청을 통해 조선에 미국 함대의 파견과 협상 의사를 통보하였다. 이에 조선은 미국과 협상할 의사가 없다는 뜻을 밝혔다. 

     미국은 조선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함대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로저스 제독이 이끄는 미국의 함대는 강화도에 상륙하여 초지진과 덕진진을 점령하고 광성보를 공격하였다(신미양요). 어재연이 이끄는 조선의 수비대가 광성보에서 격렬하게 항쟁하였지만 결국 패배하였다. 미군은 강화도를 점령하였으나 조선 정부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개항을 요구하는 서한을 남기고 돌아갔다. 

     신미양요 이후 흥선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워 서양과의 통상을 거부한다는 뜻을 알리면서 항전의 의지를 높였다. 이러한 흥선 대원군의 대외 정책은 서양 세력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막았으나, 한편으로는 조선의 근대화를 지연하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