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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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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향촌 사회의 변화 향촌 사회의 변화 사족의 향촌 지배 체제 확립 조선의 향촌사회는 사족(유력 양반)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사족은 유향소에서 지방관을 보좌하였으며, 수령도 관할 지역을 원활히 다스리기 위해 향촌 사족의 도움을 받았다. 사족은 향안을 만들고 향회를 열어 결속을 다졌으며, 향촌의 유력 세력으로 행세하면서 지방관과 향리를 견제하였다. 이에 정부는 유향소를 활용해 향천의 자치를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한편, 한성에 경재소를 설치하여 현직 중앙 관료에게 연고지의 유향소를 통제하게 하였다. 15세기말 사림 세력이 성장하면서 각 지방에 서원이 세워지고 향약이 보급되었다. 지방 사족은 서원을 중심으로 학문적 기반을 마련해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하고 권위를 높였다. 또한 전통적인 공동 조직과 미풍양속을 유교식으로 고친 규약인 ..
[한국사] 신분 질서의 변동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 확립 조선 시대의 승경도놀이는 관직 이름을 적은 놀이판을 가지고 하는 일종의 보드게임이었다. 윷 등을 던져 누가 먼저 높은 관직에 올랐다가 최종점을 빠져나가는지를 겨루었고 주로 양반가의 아이들이 즐겼다. 양반가에서는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관직 체계를 익힐 수 있도록 이 놀이를 장려하였다고 한다. 조선의 신분 제도와 특징 조선의 신분 제도는 법제상으로 양인과 천인을 구분하는 양천제였다. 양인은 자유민으로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고, 조세・공납・역의 의무를 졌다. 천인은 비자유민으로 개인이나 국가에 소속되어 천역을 담당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관직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던 양반과 양반을 보좌하는 중인이 신분으로 굳어져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4신분제가 정착되었다. 양반의 지위가 높아..
[한국사 자세히 보기] 충무공 이순신의 3대 대첩 | 노량 대첩 노량 대첩(露梁大捷) 노량 대첩은 1598년 11월 19일(선조 31년) 정유재란 당시 노량 앞바다에서 이순신을 포함한 조명 연합수군이 철군하던 왜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이다. 임진왜란-정유재란 7년 전쟁을 끝낸 전투이자 바다에서의 마지막 싸움이며, 이순신이 승리와 함께 전사한 해전이다. 배경 1597년 조선을 재침략한 왜군은 그 해 9월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패배한 데 뒤이어 도독 유정(劉綎)과 진린(陳璘)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의 참전으로 남부 제해권이 조명 연합군에게 넘어가게 되자, 해상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당하였고 육전에서도 계속 고전하였다. 일본군들은 가망이 없는 전쟁에서 철수하려 하였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본국으로의 철수를 금지해 남해안에 왜성들을 짓고 수비에 들어갔다. 다음 해 8월 도요토..
[한국사 자세히 보기] 충무공 이순신의 3대 대첩 | 명량 대첩 명량 대첩(鳴梁大捷) 명량 대첩은 1597년 9월 16일(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명량 해협(울돌목)에서 이순신(李舜臣)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의 함선 13척이 일본 수군 함선을 대파한 해전이다. 배경 임진왜란 중 명과 일본의 강화 협상이 결렬되자, 일본은 1597년 1월 다시 조선을 침략하였다. 이를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 부른다. 일본은 지난번 조선 침략의 실패는 제해권을 갖지 못한 것이라 판단하고 먼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제거하려는 계책을 꾸몄다. 당시 당쟁 중이던 조정 중신들의 반발로 이순신을 파직, 체포하고 원균(元均)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이순신은 간신히 죽음을 면하고 도원수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되었는데, 이는 일본의 이간책에 말려든 것이었다. 이순신을 ..
[한국사 자세히 보기] 충무공 이순신의 3대 대첩 | 한산도 대첩 한산도 대첩(閑山島大捷) 한산도 대첩은 임진왜란 때인 1592년 7월 8일(선조 25년) 통영 한산도 앞바다에서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 등이 거느린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의 주력대를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이 전투에서 육지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해전에서 펼쳤다. 배경 1592년 4월 왜군은 수륙병진계획으로 조선을 침략하였다. 그러나 일본 수군은 남해와 서해를 침범하던 중 옥포, 합포, 적진포(1차 출전),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2차 출전)에서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의 함대에 연전연패하였다. 그 후 일본은 해전의 패배를 만회하고자 병력을 증강시켰다. 육지전에 참가 중이던 수군장 와키자카, 구키, 가토 등에게 조선 수군 제거와 보급로 확보를 위한 일..
[한국사] 조선의 대외 관계 변화 조선의 외교 정책의 변화 임진왜란 때 조선의 주력선은 이층 구조로 만들어진 판옥선이었다. 판옥선은 노 젓는 공간과 전투 공간이 분리되어 넓은 전투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배가 단단하고 무거워 적의 배에 충격을 가할 수 있었고, 포를 쏴도 흔들리지 않았다. 조선 수군은 이런 강점을 갖춘 판옥선을 이용하여 해전에서 큰 성과를 올렸다. 사대교린 외교 조선은 건국 초기에는 태조와 정도전이 요동 정벌을 추진하는 등으로 명과 마찰이 있었지만, 태종 즉위 이후에는 조공과 책봉 체제를 바탕으로 하는 사대 외교를 펼쳐 명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다. 조선은 명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품을 보냈으며, 명에게 책봉을 받고 명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책봉은 각국의 독립성을 인정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형식적인 절차로, 책봉국..
[한국사] 사림 세력의 대두와 정치 운영의 변화 사림이 성장하고 공론 정치가 이루어지다 조선 중종 때 관리가 된 조광조는 급진적인 개혁 정치를 펼쳐 실권을 지내고 있던 훈구의 반발을 샀다. 이와 관련해 훈구가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씨를 써 두고 벌레가 갉아먹게 하여 조광조와 사림을 모함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결국 조광조와 사림은 역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받아 중앙 정계에서 제거되었다. 새로운 정치 세력 사림의 등장 신진 사대부 중 일부는 조선 건국 이후에도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지방에서 성리학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썼고 정몽주, 길재 등의 학통을 이어갔다. 이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림은 15세기 후반 중앙 정치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였다. 당시 성종은 세조 때부터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세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공훈을 세운 세..
[한국사 자세히 보기] 위화도 회군 위화도 회군,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 위화도회군은 1388년(우왕 14년)에 우왕의 명령을 받아 요동 공격을 위해 진군했던 이성계 등이 이끄는 군대가 압록강 중앙에 위치한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과 최영을 제거하고 고려의 실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배경 14세기 중엽 원이 점점 쇠퇴하자 당시 즉위한 공민왕은 이 기회를 틈타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몽골의 침입으로 빼앗긴 쌍성총관부를 회복하고, 1369년(공민왕 18년)부터 원을 몽골 고원으로 쫓아내고 중국 본토를 새로 장악한 주원장의 명과 새로 외교를 맺었다. 공민왕은 1360~70년대 초에 세 차례 군대를 보내 북원이 지배하고 있던 요동 지방을 공격해 이곳의 원의 세력을 몰아내고 그 지역에 살고 있던 고려인들을 통치 영역에 편입시키고자 하여 일정한 성과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