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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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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조선의 성립 조선의 건국과 유교 정치의 확립 조선 시대의 사람들은 지금의 주민 등록증처럼 신분을 증명하는 호패를 지니고 다녔다. 호패는 16세 이상의 모든 양인 남자에게 발급하였고, 호패에는 주인의 이름과 출생 연도, 과거 급제사실, 직위 등의 정보를 적었다. 조선 정부는 호패를 세금을 거두거나 군사를 징발하는 등 통치에 활용하였다. 고려 말 사회 혼란 지속 14세기 중엽 중국에서는 원이 쇠퇴하며 한족 농민 반란군(홍건적)이 일어났다. 주원장은 홍건적을 이끌고 원을 만리장성 밖으로 몰아내는 한편, 명을 건국하였다. 일본에서는 막부의 통제력이 약해지면서 왜구가 더욱 기승을 부렸다. 고려도 큰 혼란을 겪었다. 권문세족과 불교 사원이 농장을 확대하면서 백성을 수탈하였고, 홍건적과 왜구도 침입해 왔다. 이에 신진 사대부는 ..
[한국사] 고려의 종교와 사상 다양한 종교와 사상이 유행하다 고려 인종이 병에 걸려 위독하자 왕의 회복을 기원하는 여러 종교 행사가 열렸다. 절에서 부처에게 기도하고 승려들에게 식사를 대접하였으며, 종묘와 사직에서 제사를 지내는 한편, 유교와 도교의 신에게도 빌었다. 무당이 인종의 병에 대해 척준경의 원혼이 깊은 탓이라 하자 이 말에 따라 이미 사망한 척준경을 사면하고 새로 쌓은 벽골제의 제방을 허물기도 하였다. 불교의 발달 • 국가의 불교 보호와 서적 편찬 불교는 고려인의 정신세계와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고려는 건국 초부터 숭불 정책을 추진하여, 국가 차원에서 팔관회와 연등회 등 불교 행사를 열었다. 승과를 실시하여 합격한 승려에게 승계를 주었으며, 신망 높은 승려를 왕사와 국사로 삼는 제도를 마련해 불교에 국교의 지위를 ..
[한국사] 고려의 사회 다원적인 사회 운영 고려 시대에는 특수 행정 구역인 소에서 구리, 철, 자기, 종이, 먹 등을 생산하여 국가에 바쳤다. 소의 주민은 군현의 주민과 같은 신분이었으나 이들에 비해 공물 부담이 과중하여 고통받았다. 정부는 소와 같은 특수 행정 구역이 전쟁 등에서 공을 세우면 군현으로 승격시켜 준 반면, 적에게 항복하거나 반란을 일으킨 군현은 특수 지역으로 낮추었다. 고려의 신분 구성 양천제 고려의 신분 제도는 법제적으로 양인과 천인으로 구분된 양천제였다. 양인은 자유민으로 납세와 군역의 의무를 졌으며,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양인은 다시 관직 등 국가의 직역을 맡은(지배층) 정호와 직역이 없는(피지배층) 백정 등으로 구분되었다. 천인은 비자유민으로 대부분이 노비였다. 다양한 지배층이 존재 양인 지배층은 ..
[한국사] 몽골의 간섭과 정치 변화 원의 간섭과 새로운 정치 세력의 성장 몽골군이 고려를 침략하자 무신 정권의 집권자 최우는 수도를 강화도로 옮길 것을 결정했다. 이에 개경의 백성은 장맛비를 맞으며 강화도로 들어갔다. 최우는 강화도에 궁궐을 짓게 하고 몽골이 재차 침입할 것에 대비하여 내성, 중성, 외성으로 구성된 성을 쌓도록 했다. 몽골의 침략과 무신 정권의 몰락 13세기 초에 칭기즈 칸이 몽골을 통합하며 세력을 확대하였다. 고려는 고려에 들어온 거란적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몽골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1219). 이후 몽골은 과도한 공물을 요구하며 고려를 압박하였고, 몽골 사신이 귀국길에 살해된 사건을 구실로 고려를 침입하였다(1231). 최우는 강화를 요청하여 몽골군을 물러나게 하는 한편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장기 항전을 준비하였다. ..
[한국사] 고려 사회의 동요와 무신 정권 무신 정권이 성립하다 고려 사회의 동요 성종 이후 국가 체제가 안정되며 여러 세대에 걸쳐 중앙의 고위 관직을 차지한 문벌이 형성되었다. 문벌은 왕실 및 다른 문벌 가문과 폐쇄적으로 혼인 관계를 맺어 권력을 독차지하였고 이들은 특권을 누리며 점차 보수화되었다. 숙종과 예종은 지방 출신 인물을 등용하여 문벌을 견제하기도 하였다. 한편, 여진 정벌이 실패로 끝나면서 정벌에 반대하던 보수적 문벌 세력이 더욱 강해졌다. 특히 경원 이씨 가문은 여러 대에 걸쳐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어 권력을 독점하였다. 이자겸 대에 이르러 경원 이씨 가문의 세력은 왕권을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 인종은 측근 세력을 동원하여 이자겸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이자겸은 난을 일으키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1126). 이 ..
[한국사 자세히 보기] 고려 거란 전쟁 고려 거란 전쟁 | 실제 역사 자세히 보기 고려 거란 전쟁은 993년(성종12년)부터 1019(현종 10년)에 이르기까지 26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거란이 고려를 침략한 전쟁을 가리킨다. 고려 거란의 초기 관계 고려 건국 초기에 거란은 현재의 몽골과 만주 지방에서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유목 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등장하여 여러 부족을 통일한 뒤 916년에 거란국을 건국했다. 이들은 국명으로 거란 혹은 요(遼)를 사용하였다. 거란은 926년에 발해를 멸망시키고 만주 지역을 통치하는 등 세력을 급속도로 확장하였고, 중국 대륙의 왕조들과 교류・갈등하며 북방의 강자가 되었다. 고려 태조는 발해 유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한편 거란에 대해 '금수지국(禽獸之國)'이라 비판하고 적대적인..
[한국사] 고려의 국제 관계 국제 관계에서 안정을 꾀한 고려 서울 관악산에는 별이 떨어진 곳이라는 의미를 가진 낙성대가 있다. 이곳에는 강감찬의 탄생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져 들어간 집에서 강감찬이 태어났다는 이야기이다. 고려의 문신이자 명장인 강감찬은 거란의 침략 때 홍화진 강물을 막은 뒤 터뜨려 거란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이후 물러가는 거란군을 귀주에서 대파하였다. 고려 초기의 국제 관계 태조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요)을 적대시하고, 중국의 한족 왕조와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갔다. 북방의 여진에게는 회유와 토벌 정책을 함께 펼쳤다. 이후 고려의 왕들도 태조의 대외 정책을 계승하였다. 정종은 거란의 침입에 대비해 광군을 편성하였으며, 여전에게는 공물을 받고 물품을 하사하였다. 10세기 중반 송과 거란..
[한국사] 고려의 후삼국 통일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통치체제를 정비하다 경상북도 안동에서는 매해 정월 대보름에 차전놀이가 벌어진다. 차전놀이는 나무를 교차하여 만든 기구에 대장이 올라타 상대를 밀어내면 승리하는 놀이이다. 이 놀이는 지금의 안동 지역에서 벌어진 고려와 후백제의 전투에서 유래하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고려 왕건은 안동 호족들의 도움으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를 기념하면서 차전놀이가 전승되었다고 한다. 후삼국의 분열과 고려의 통일 궁예는 북방 지역 호족들의 지원으로 송앙(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후고구려를 세웠다(901). 송악의 호족인 왕건은 궁예의 부하가 되어 후백제의 금성(나주)을 점령하는 등 공을 세웠다. 후고구려의 궁예는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고, 국호를 태봉으로 바꾸었다. 궁예는 왕권을 강화하고자 호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