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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동아시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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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사] 불교의 전파 불교의 전파   대승 불교의 성립     기원전 6세기경 인도에서 브라만교에 반대하는 새로운 종교 운동이 일어났다. 그 가운데 석가모니가 창시한 불교는 평등을 강조하며 평민과 도시의 상공업자 사이에 널리 퍼졌다. 불교도들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따라 해탈을 목표로 명상과 교리 연구에 전념하였다. 석가모니가 죽은 후 불교는 교리와 계율의 해석 문제로 인해 여러 부파로 나뉘었다.     기원전 1세기 경이 되자 불교에 새로운 움직임이 발생하였다. 이들은 스스로 대승 불교라 부르면서 종래의 불교(상좌부 불교)를 소승이라고 불렀다. 대승 불교는 출가 수행자가 아닌 일반 신도의 깨달음을 중시하였다. 또 부처를 신격화하고, 부처의 자비로 대중이 구제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상좌부 불교는 주로 동남아시아로, 대승 ..
[동아시아사] 유교와 율령의 동아시아 전파 유교와 율령의 동아시아 전파      유교와 율령, 그에 따른 통치 제도는 주변 나라에 전해져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각 나라는 유학을 장려하고, 교육 기관을 설치하여 유교 경전을 가르쳤다.   한반도 왕조의 율령 체제 수용     한반도의 삼국도 율령을 반포하여 중앙 집권적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다. 특히 신라는 당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고 관리들의 지위를 정하였다. 그러나 당의 율령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각국의 통치 형태와 이념, 관습 등 현실에 맞게 선별적으로 수용되었다.     신라는 골품제를 바탕으로 관위나 관직에서 고유성을 유지하였으며, 과거제 대신 독서삼품과를 실시하여 실무를 담당하는 관인을 일부 충원하였다. 또한 세금 징수와 군역 및 요역 징발을 ..
[동아시아사] 율령과 유교 율령과 유교   율령 도입과 진의 법치     율령은 동아시아 사회에서 국가가 백성을 다스리는 주요 수단이었다. 율령에는 국가의 통치 조직, 관리의 복무 사항, 백성의 조세와 노역 등이 자세히 규정되어 있다. 처음에는 형벌 위주의 법률(율)이 중심이었으나, 점차 국가를 통치하기 위한 행정 법률(령)의 조항이 늘어났다. 율령은 넓은 지역에 걸쳐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지고 사는 사람과 다양한 지역, 복잡한 사회를 다스리기 위한 통일적인 기준 역할을 하였다.     전국 시대에 상앙과 한비 등의 법가 사상가가 활약하였는데, 법가 사상은 율령의 제정에 영향을 주었다. 진은 상앙을 등용하여 부국강병책을 실시하고 중앙 집권화에 성공하여 전국 시대 최강의 나라가 되었다. 한비는 ‘인간의 본성은 본래 악하다.’라는 순자..
[동아시아사] 명의 건국과 동아시아 질서의 재편 명의 건국과 동아시아 질서의 재편   명의 건국     14세기 중엽 만성적인 재정 부족과 재연재해 등으로 원이 쇠퇴하자 이 틈을 타 백련교도를 중심으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홍건적 출신의 주원장은 각지의 반란 세력을 통합하여 난징에 도읍하고 명을 건국하였다(1368). 이어 대도를 점령하고 몽골 세력을 초원 지역으로 내쫓았다. 명 태조(홍무제)는 한족 문화의 회복에 노력하여 몽골 풍습을 금지하고 성리학을 중시하였다. 또한 육유를 제정하여 유교적 통치를 시행하였으며, 재상제를 폐지하여 6부를 황제에게 직할시킴으로써 황제권을 강화하였다.진이 처음으로 재상을 두고 얼마 있지 않아 망하였다. 한·당·송이 이 재상제를 이어받았는데, 때로 현명한 재상도 존재했지만 사이사이 소인이 권력을 농단하고 정치를 어지..
[동아시아사] 몽골 제국의 등장과 동아시아 몽골 제국의 등장과 동아시아   몽골 제국의 성립과 발전     13세기 초 몽골 초원에 테무친이 등장하여 몽골계 부족을 통합하고 몽골 제국을 건설하였다(1206). 그는 쿠릴타이에서 칭기즈 칸으로 추대된 다음, 자신의 나라를 예케 몽골 울루스, 즉 대몽골 제국이라 불렀다. 칭기즈 칸은 친위대를 조직하고 천호제를 재편하여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다.     초원 지역 유목민의 역량을 결집한 몽골의 군사력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먼저 서하를 공격하여 조공을 받고 금을 공격하여 굴복시켰다. 이어 중앙아시아의 호라즘 왕국을 정벌하여 비단길을 장악하였다. 칭기즈 칸 사후 몽골 제국은 동으로는 금을 멸망시키고, 서로는 이슬람의 아바스 왕조와 동유럽의 키예프 공국을 점령하여 초원길을 손에 넣음으로써 유라시아 대륙을 ..
[동아시아사] 북방 민족의 성장과 새로운 외교 질서_대외 관계 북방 민족의 성장과 새로운 외교 질서_대외 관계   송의 대외 관계와 교역     송을 세운 조광윤(태조)은 5대 10국의 분열을 통일하였다. 그는 무인과 절도사의 권한을 축소하고 문치주의를 채택하였다. 아울러 과거제의 위상을 강화하고 전시를 도입하였다. 이에 따라 황제권이 강화되고 문신 관료제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문치주의로 군사력의 약화를 초래하여 송은 거란(요), 서하, 금 등에 군사적인 열세에 놓이자, 그들과 맹약을 맺고 매년 막대한 물자를 제공하여 평화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11세기 중엽 왕안석이 등장하여 재정 수입을 늘리고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 신법을 시행하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당쟁이 일어나고 국론이 분열되면서 오히려 국력이 약해졌다. 이후 송은 금의 침공을 받아 강남으로 이주하..
[동아시아사] 북방 민족의 성장과 새로운 외교 질서 북방 민족의 성장과 새로운 외교 질서   새로운 국제 질서의 형성     10세기 이후 동아시아에 새로운 국가들이 나타나 국제 질서가 재편되었다. 이전까지 절대적인 강자로 군림하던 중원의 당이 쇠퇴하고 주변 민족이 발흥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여러 나라가 다각적으로 상호 교류하는 다원적 국제 관계가 형성되었다.      중원에서는 당이 멸망하고 5대 10국의 분열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혼란을 피해 화북의 주민들이 주변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이들을 따라 선진 문화가 전파되었다. 북방 민족은 그들을 받아들여 발달한 농경문화를 습득하였고 국가 체계를 발전시켜 나갔다.     10세기 초 거란족이 랴오허강 상류에서 국가를 수립하고 세력을 넓혀 갔다. 11세기 초에는 중국 서북 지역에서 탕구트족이 서하를 수립하였..
[동아시아사] 조공・책봉 관계의 형성_수・당 제국과 한반도, 일본 조공・책봉 관계의 형성_수・당 제국과 한반도, 일본   수・당 제국과 한반도, 일본     6세기말 수가 분열된 남북조를 통일한 후 동아시아 외교 질서에는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 초기에 수는 돌궐에 수세적인 자세를 보였으나 이윽고 돌궐을 복속시켰다. 그리고 주변국에 대해 적극적인 정책을 펼치면서 자국 중심의 국제 질서를 구축하려 하였다. 고구려가 이에 저항하자 수는 여러 차례 고구려를 침공하였지만 실패하고, 결국 멸망하였다.     당도 자국 중심의 조공·책봉 관계를 주변국에 요구하고, 주변국이 저항할 때에는 적극적으로 군사 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이 돌궐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일시 복속시켰던 것이라든가, 고구려를 침공하였던 것 등이 그러한 사례이다.      한반도의 신라와 발해 등은 정권을 안정시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