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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동아시아사

[동아시아사] 유교와 율령의 동아시아 전파

유교와 율령의 동아시아 전파 

     유교와 율령, 그에 따른 통치 제도는 주변 나라에 전해져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각 나라는 유학을 장려하고, 교육 기관을 설치하여 유교 경전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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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와 율령의 동아시아 전파

 

한반도 왕조의 율령 체제 수용

     한반도의 삼국도 율령을 반포하여 중앙 집권적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다. 특히 신라는 당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고 관리들의 지위를 정하였다. 그러나 당의 율령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각국의 통치 형태와 이념, 관습 등 현실에 맞게 선별적으로 수용되었다.

     신라는 골품제를 바탕으로 관위나 관직에서 고유성을 유지하였으며, 과거제 대신 독서삼품과를 실시하여 실무를 담당하는 관인을 일부 충원하였다. 또한 세금 징수와 군역 및 요역 징발을 위해 백성의 호구와 재산을 파악한 신라 촌락 문서를 작성하였다.

     발해는 당과 마찬가지로 중앙 관제로 3성 6부제를 도입하고 지방에 주현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3성 6부의 명칭과 관직 체계를 당과 달리하여 독자적으로 운영하였다.

 

 

 

 

일본 열도의 율령 체제 수용

     일본은 수·당의 율령을 받아들이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일본은 국가가 토지와 백성을 소유하고 백성의 생활을 보장해야 한다는 이념을 내세워, 백성에게 토지를 골고루 나누어 주는 반전수 수제를 시행하였다. 701년에는 당의 율령과 흡사한 다이호 율령이 법전으로 완성되었다. 중앙에는 2관 8성을 두고 지방에는 국· 군·리를 두어 당과 같은 중앙 집권적 국가 체제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중앙 행정 조직에서 제사를 관장하는 신기관을 중시하였고, 상급 지방 행정 조직에는 중앙에서 관인을 파견하고, 군에는 현지의 지방 호족을 종신직으로 임명하는 등, 씨족제적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어 수·당의 율령이 그대로 적용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교육 기관과 유학, 그리고 한자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유교와 율령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은 한자를 공통의 소양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수용 과정에서 한자・한문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졌으며, 한문학이 발달하였다.

     한 대에 유교가 국가 통치 이념으로 채택되면서 중앙 교육 기관으로 태학이 설립되었다. 당 이후에는 율령 제도가 확립되어 행정 업무가 많아지자 한자로 이루어진 문서를 해독하고 작성할 수 있는 관료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 이에 유교적 지식과 교양을 갖춘 관료가 늘어났다.

     한반도에서도 한문을 능숙하게 해석하고 유교 지식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 기관이 세워졌다. 고구려는 중앙에 태학을, 백제는 오경박사, 발해는 주자감 제도를 도입하였다. 통일 후 신라는 국학을 설립하여 오경 등 유교 경전을 가르쳤다. 그리고 국학의 학생들을 경전의 이해 정도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고 관리로 임용하는 독서삼품과를 시행하였다. 이는 하급 관료를 충원하기 위한 제도로, 고위 관리를 선발하기 위해 과거제를 시행한 중국과 달랐다.

     일본 열도에서도 한자는 중국 및 한반도와 교류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 백제를 통해 유교 경전을 수용하였고, 오경 등을 가르쳤다. 관리 양성 기관으로는 중앙에 대학, 지방에 국학을 설치하였다. 

     이처럼 율령의 전파와 수용은 동아시아의 문화 교류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한자와 함께 이 시기 각국에 전파된 유교와 율령, 불교는 동아시아 문화권의 공통 요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