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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동아시아사

[동아시아사] 불교의 토착화

불교의 토착화 

     불교는 동아시아 지역에 확산하면서 토착 신앙이나 전통 사상과 결합하였다. 

 

썸네일 - 불교의 토착화
불교의 전파와 토착화

 

진평왕 때 지혜라는 비구니가 불전을 수리하려고 하는데 돈이 모자랐다. 어느 날 꿈속에 아름다운 선녀가 나타났다. “나는 선도산의 신모(神母)다. 네가 불전을 수리하는 것을 어여삐 여겨 금 10근을 주겠노라. 내 자리 밑에서 금을 꺼내어 불상을 장식하고 벽에는 부처와 대중, 그리고 여러 천신(天神)과 산신을 그려 넣어라.”
- 『삼국유사』 -

 

     조상 숭배와 결부되어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불교 신앙이 나타났고, 중국에서는 유교 윤리를 수용하여 효를 강조하는 『부모은중경』이라는 경전도 만들어졌다. 이는 인도에 없던 새로운 경전으로, 한반도와 일본 등지에까지 보급되었다. 한반도에서는 불교가 발전하면서 칠성, 산신 등의 토착 신을 포용하였다. 이에 따라 사찰에 산신각, 칠성각 등이 세워졌다. 일본 열도에서는 불교가 일본 고유의 신앙인 신토와 결합하였다. 불교 전래 초기에 일본인들은 부처도 여러 신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였다. 불교의 힘이 강해지면서, 이러한 경향은 신토의 신들이 부처나 보살의 모습을 바꾸어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하는 신불습합 사상으로 이어졌다.

 

 

 

 

선종의 발달

     동아시아에서는 다양한 불교 종파가 발전하였다. 그중 하나가 직관적 깨달음과 참선을 중시한 선종이다. 6세기 초 남인도 출신 달마가 선종을 세웠다. 당대 선종은 유학승 등을 통해 각국에 전해져 주류 종파로 성장하였다. 한반도에서는 신라 말 도의 선사에 의해 선종이 전해진 후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른 지방 호족의 지원 아래 성장하면서 화엄종 등 교종과 대립하였다. 고려에서는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의천은 교종 계통으로서 송 방문 이후 둘을 통합하고자 하였고, 지눌은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을 포용하는 이론을 정립하였다. 

     일본 열도에서는 가마쿠라 시대 무사들 사이에 선종이 크게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선종의 직관이 순간적인 승부를 추구하는 무사도와 잘 맞았기 때문이다. 또한 선종은 문학, 다도, 정원 등 일본 문화의 발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불교를 통한 교류

     불교가 동아시아에서 보편적 종교로 자리 잡으면서 각국 사이의 문화 교류가 더욱 활성화되었다. 중원에서 발달한 새로운 불교문화는 육로와 해로를 따라 동아시아 각지로 전파되었다.

     남북조와 수·당을 거치며 중원에서는 천태종, 화엄종, 정토종을 비롯하여 선종 등의 다양한 종파가 발전하였다. 이러한 종파는 대부분 유학승을 통해 한반도와 일본에 전파되어 많은 영향을 끼쳤다. 불교 미술도 동아시아 각지로 전파되었다. 불상과 탑, 회화 등이 한반도의 삼국에 영향을 주었고, 주로 백제를 통해 다시 일본 열도로 전해졌다. 일본 호류사의 백제 관음상과 고류사의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이러한 교류 상황을 잘 보여 준다.

     불상으로는 석불을 비롯하여 청동에 금을 입힌 금동불, 나무에 직접 조각하거나 나뭇조각을 결합한 목불, 나무틀에 진흙을 입힌 이불, 종이나 천을 이용한 건칠불 등 다양한 방식의 불상이 만들어졌다. 불화의 제작과 더불어 안료 등을 사용한 새로운 회화 기법이 동아시아 각지에 전파되었다. 

     중원의 사원 건축 양식도 한반도와 일본으로 전해졌다. 한반도와 일본에서는 사원의 거대한 건축물을 조성하기 위해 바닥에 커다란 초석을 놓고, 그 위에 붉은색으로 칠한 굵은 기둥을 세웠다. 그리고 건물 지붕은 기와로 덮었다. 이러한 건축 기술은 이후 궁궐 등의 거대한 건축물을 짓는 데도 이용되었다.

     불경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인쇄술도 발달하였다. 8세기에 신라에서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일본에서는 「백만탑다라니경」이 간행되었다. 송·요·금도 대장경을 간행하였으며, 고려도 여러 차례 대장경을 만들었다. 그중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은 수집된 경전의 많은 양뿐만 아니라 인쇄술의 수준에서도 큰 자치를 인정받고 있다. 

 

 

 

 

인적・지적 교류의 증대

     승려들이 불교를 배우거나 불경을 구하려고 빈번하게 왕래하면서 각국 간의 인적・지적 교류가 활발해졌다. 사찰은 국적을 초월한 공간으로 많은 사람이 교류하는 장소이자 지식을 전파하는 중심지였으며, 승려는 국적을 따지지 않는 국제인이었다. 

     당의 현장은 인도에 유학하고 다수의 불경을 가지고 돌아와 번역하였으며, 신라의 해초는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다녀와  「왕오천축국전」

을 남겼다. 일본의 쇼토쿠 태자는 고구려의 승려 혜자를 스승으로 모셨으며, 당의 감진은 일본에 건너가 계율을 전하였다. 신라의 의상, 일본의 엔닌 등은 불교를 배우기 위해 당에 유학하였다. 

     불경을 읽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한자와 한문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졌다. 승려들은 한문으로 된 불경을 읽고 한자를 써서 의사소통할 수 있었다. 이후 신라에서는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이두가 만들어졌고, 일본에서도 한자를 변형하여 일본어를 표기하는 가나가 만들어졌다. 

 

 

 

 

동아시아 문화권의 성립

     수와 당은 외래문화에 개방적인 세계 제국이었다. 특히 당의 수도 장안은 전성기에 인구 100만 명이 넘는 대도시로,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많은 나라가 당과 교류하고자 사신을 파견하였으며, 많은 사람이 당의 문화를 배우기 위해 찾아들었다. 이 밖에 상인, 예술가 등 다양한 외국인이 장안에 체류하였다. 이에 따라 당의 수도 장안을 중심으로 각국의 종교와 문화가 교류되었다.

     신라는 7세기 중엽부터 당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신라인의 왕래가 잦아지며 산둥반도를 비롯해 당의 해안 지역에 신라방이 세워졌다. 발해도 당에 많은 학생과 승려를 파견하였다. 당은 산둥반도에 발해 사신을 접대하는 발해관을 설치하였다. 일본은 7세기 이후 활발하게 견당사를 파견하여 당의 문물을 도입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한동안 중국 문화가 ‘당풍’이란 이름으로 유행하였다.

     교류가 활성화됨에 따라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인물이 나타났다. 신라의 최치원은 당의 과거에 합격하였으며, 장보고는 청해진을 설치하고 동아시아 해상 무역을 주도하였다. 이밖에도 한반도와 일본 열도 출신의 많은 유학생과 유학승이 중원 지방에서 활동하였다.

     이렇게 활발한 문화 교류를 바탕으로 동아시아 세계가 형성되었다. 중국과 한반도, 일본 열도, 베트남 등지는 한자를 매개로 하여 율령과 유교에 기초한 통치 체제, 불교 등을 공유하게 되었다. 이를 동아시아 문화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같은 문화 요소라 해도 모두 자국의 사정에 맞게 변형하여 수용하였다.